공지사항

【강론】 사부 성 베네딕도 대축일 강론

procurator 0 867 2020.07.14 15:32

사부 성 베네딕도 대축일 강론


부활이 오기 전에는 사라질 줄 알았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성령강림이 지나고, 사부 축일이 왔지만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성모 승천 때도 아니면 성탄이 오도록 갈피를 못 잡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세상이 멈추었고 시간이 멈추었습니다. 덕분에 자신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분주히 움직이지 않고도 살 수 있었구나. 안 해도 그만인 일들에 목매며 일희일비했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됩니다. 정작 삶의 복판은 때리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살았구나. 이런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 코로나19 사태로 얻은 이득입니다.


밖에서는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지만, 솔직히 저는 요즘이 참 행복합니다. 무절제한 삶을 정돈하고 소홀했던 몸과 마음을 챙기고 있습니다. 책을 다시 집어 들었고 묵상 시간도 예전보다 충실해졌습니다. 살을 빼려고 운동을 하고 있는데 그 덕분인지 몸이 개운해지고 아침에 일어나기가 가뿐해졌습니다. 매일 지각하던 아침기도에 늦지 않게 된 것도 작지만 큰 변화이기도 합니다. 좋은 습관이 반복되면 덕이 되고, 덕이 무르익으면 자연스레 완덕의 경지에 이르는 법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작은 변화들로 인해 얻은 새로운 인식도 있습니다. 아침기도 시간에 늦어서 헐레벌떡 조급한 마음으로 성당에 들어갈 때에는 가장 먼저 원장 신부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 다음 제대와 십자가에 시선이 가고 동시에 빈자리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여유를 갖고 아침기도에 들어오는 요즘에는 성당 문을 열자마자 코러스 맨 윗줄을 채우고 있는 선배 수도형제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띕니다. 종이 치기 전에 들어가도 그 줄은 항상 전부 채워져 있습니다. 자리도 거의 고정되어 있어 마치 코러스와 하나가 되어 보입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고대하는 원로들의 모습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묵직한  울림이 있습니다.


말없는 이 가르침을 어떤 의미로든 구체화시키고 싶지만 사유가 짧은 탓에 쉽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신문을 읽다가 바로 이거 다 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잠시 나누어 보겠습니다. 어느 교수의 죽음에 한 제자가 남긴 추도사의 일부입니다.


“그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살아가는 법을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부끄럽고, 실수하고, 상처주고 살아왔다고.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므로 내일은 조금만 덜 부끄럽게 살자고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부끄러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치사함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비겁함이 있다는 것을 늘 인정했습니다. 자신의 비겁함과 허약함을 인정하고 또 타인의 허약함과 비겁함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엔 우리가 같은 물방울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내가 미워하고 부정하는 당신도 이 물방울 속에 같이 살며, 그토록 안간힘 쓰면서 이 아슬아슬한 물방울의 장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아슬아슬한 물방울의 장력을 유지하는 일. 남과 더불어 살려는 한 깨어 있는 지식인의 안간힘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 맺어지는 관계가 사실 이렇습니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들입니다. 예민하고 까다롭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상처로 꽂히고, 우연한 눈길 하나 몸짓 하나가 심각한 의미로 다갑니다. 한편 욕을 하고 비판을 해대던 형제와 어느 날 술잔을 기울이고 죽고 못 살던 형제들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 못 본 체합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계가 좋아야 형제와 관계가 좋다는 충고를 자주 듣지만, 상투스들은 왕따가 되기 십상이니 그것도 다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공동체 생활에 왕도는 없습니다.


더불어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데도 우리는 공동체를 통하여 하느님을 찾으려고 이곳에 모여 삽니다. 공동체 수도생활은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 교회에 남겨 주신 위대한 영적 유산이며 또한 우리가 미래 세대에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기도 합니다. 사부께서 공동체 수도생활을 주창한 역사적 배경에는 야만족의 침입이 있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붕괴되고 와해된 개인의 삶과 공공질서의 틀을 다시 세워야 하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시기에 가치관과 신념을 공유하는 수도공동체라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사태로 세상이 멈춘 이 시기 역시 전환의 시기임을 많은 사람들이 직감합니다.


공생의 시대를 살 것인가, 독존의 시대를 살 것인가. 현재 우리는 이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아무것도 만지지 마라.”,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마라.” 지금 우리가 외치고 있는 코로나19 슬로건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의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독존을 강요받더라도 공생을 향한 돌파구를 열어야 합니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을 통해 함께 사는 삶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이 사태의 긍정적인 효과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는, 공생의 윤리를 부정하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면역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탐욕의 바이러스라는 어느 문학평론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부의 축일을 성대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지만 오히려 성인께서 물려주신 영적 유산의 가치를 재평가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생활 속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요즘, 수도공동체 안에서 긴장이 완화된 느낌이 듭니다. 서로 부딪히지 않고 서로 만나지 않으니 홀가분하고 마음 편한 면도 없지는 않으나, 혹여 느슨해진 관계가 단절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모든 문제를 사랑으로 풀어나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모든 문제의 해답은 사랑이고 사랑은 십자가를 통해서 실천됩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이 혼돈의 시기에 완덕의 끈인 사랑으로 형제적 유대와 친교를 더욱 다져나갔으면 합니다. 모쪼록 세상 곳곳에 흩어진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들이 참사랑이 넘치는 형제적 우애 공동체가 되어 탐욕의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력을 키우는 배양실의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하며 강론을 마무리합니다.


2020년 7월 11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고진석 이사악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