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야고보 사도 축일 특집] 산티아고 길에서 온 편지 - ‘까미노’ 위에 살면서
돌아온 뒤 깨달았다. 진짜 순례길은 ‘삶의 자리’라는 것을…
산티아고 순례 첫째 목적은 성 야고보 사도 유해 참배
주님 향한 사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도 주님 만나려 걸어간다
막상 도착하면 회의감이 든다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걸었을까’
몇 달 지나 또렷이 알게된다 일상에서 걸어야 할 순례길을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안치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향해 걷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Route of Santiago de Compostela, 일명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은 최근 들어 많은 이들에게 ‘버킷리스트’로 꼽히고 있다.
1189년 알렉산더 3세 교황이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성스러운 도시로 선포했던 이곳은 이제 종교를 떠나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와 위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길로 떠올려지고 있다.
우리는 왜 이 길을 걷고 싶은 것일까. 신앙인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것일까.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아 스페인 레온 주 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사목하는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글을 통해 그 길의 의미를 묵상해 본다.
인영균 신부가 지난해 10월 22일 프랑스 생쟌에서 출발해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40일 동안 걸었던 순례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있는 성 야고보 사도 유해를 참배하기 위해 전 세계 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길을 걷고 있다.
■ ‘까미노’ 위에 살면서
‘까미노’(Camino), 우리말로 ‘길’이다. 나는 지금 실제로 까미노 위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선교사로 살고 있다. 벌써 1년이 넘었다. 까미노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서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아니 잠을 잘 때도 까미노는 늘 내 삶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사람들이 정말 많이 온다. 나이, 국적, 인종을 불문하고 모두 무엇에 홀린 듯 걷고 또 걷는다.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부자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학식이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상관없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똑같이 걷는다. 신앙인도, 무신론자도, 불자도 걷는다. 2015년 한해만 해도 100㎞ 이상 순례한 사람이 26만2458명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작년에 4534명으로 8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까미노 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이곳 라바날 델 까미노 마을주민들과 다른 나라 순례자들은 한국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 이유를 정말 많이 묻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가리비 조개 껍질 모양의 화살표.
내가 만난 순례자 가운데 어떤 이는 미래를 고민하려고, 혹은 단순히 걷는 것을 좋아해서, 혹은 참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서 왔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 하나같이 목마른 사람들로서 자신이 살던 자리가 싫고 힘들어 탈출한 이들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까미노가 여행이나 트레킹이 아니라 ‘순례’라는 것이다. 이 길에 들어선 순간부터 ‘뻬레그리노’(Peregrino), 곧 ‘순례자’가 된다. 순례는 ‘목적지를 향해 걷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그저 유람 혹은 방랑일 뿐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목적지다. 바로 거기에 성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의 첫째 목적은 ‘야고보 사도의 유해를 참배하러 가는 것’이다.
사도 성 야고보는 예수님에게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 매료된 사람이다. 전승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 선포 명령에 따라,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거쳐, 당시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한 스페인 북서쪽 끝에 있는 ‘갈리시아’ 지역과 기원후 40년경에는 스페인 ‘사라고사’에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가, 기원후 44년경 열두 사도 가운데 제일 먼저 주님을 위해 순교의 피를 흘렸다(사도 12,1-2). 순교하기 전 사도는 스페인에서 자신의 제자가 된 두 사람에게 자신의 시신을 스페인 땅에 안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들은 사도의 유해를 배로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 모시고 들어와 우여곡절 끝에 안장했다. 그 후 여러 이유로 사도의 무덤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9세기 초 ‘펠라지오’라는 은수자가 주님의 계시를 받아 별빛이 비추는 땅에서 사도의 유해를 기적적으로 발견하였다. 그 자리에 장차 현재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될 경당이 세워졌다. 이때부터 전 유럽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이 순례를 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생긴 순례길이,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이 걷는, 프랑스에서 피레네 산을 넘어 스페인 북쪽을 거쳐 오는 ‘프랑스 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모셔진 야고보 사도의 유해는 단순히 죽은 이의 유골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의 증거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의 근본적인 목적은 ‘야고보 사도를 통해 드러난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면 이 길은 제주도 올레길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까미노는 ‘정직한 길’이다. 온 몸으로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한 햇볕이 내리쬐고 세찬 비가 들이닥쳐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불고 앞이 안보일 정도로 눈이 쏟아져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걷는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온 몸이 빈대에 물리더라도, 잠자리가 불편하고 먹는 것이 부실해도, 그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걷는다. 꼭 필요한 것만 짊어지고 걷는다. 그 외의 것은 욕심이다. 그래서 온전히 ‘내어맡기는 길’이다. 인간적인 계획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루하루 그분 손에 맡긴다. 누굴 만날지, 어디까지 갈지,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잘지 모른다. 그저 내어맡길 뿐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십자가와 돌무덤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동기가 무엇이든 개인적인 모든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오로지 본질적인 것 하나만이, 곧 야고보 사도의 주님께 대한 사랑 안에서 우리 자신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온 몸으로 정직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의 주님께 대한 불타는 사랑 안에서 주님을 만난다면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모든 것은 주님 안에서 승화될 것이다.
나 역시 작년 10월 22일 프랑스 생쟌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까지 40일 동안 순례했다. 초반에는 따가운 햇볕이, 후반에는 차가운 비와 눈을 동반한 추위가 순례길을 동행했고, 두 차례나 빈대에 물려 손이 퉁퉁 붓도록 고생을 했다. 게다가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3일 전에는 한국에서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이 갑자기 선종하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참으로 깊은 슬픔 속에서 걸어야 했다. 마지막 여정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런 상태에서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사실 나 자신도 인간인지라 산티아고에서 무엇인가 깊은 깨달음을 얻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막상 대성당에 도착하니 머리와 가슴이 텅 빈 느낌뿐, 아무것도 없었다. 허무와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대성당 광장에 배낭을 던져두고 거의 두 시간 동안 멍한 상태로 대성당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내가 왜,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걸었지’라는 의문과 회의감이 들었다. 산티아고에서 며칠을 지내며 대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사도의 무덤에서 기도를 드리고는 수도원에 돌아왔다.
몇 달이 지나면서 내가 걸었던 순례길이 마음속에 선명하게 찬찬히 떠오르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짜 순례길’이라는 사실이다. 진짜 순례길은 순례를 마치고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삶의 자리’다. 까미노가 우리가 잊고 살았던 이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까미노는 영적인 길, 신앙의 길, 하느님의 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가 사도 야고보가 생명을 바쳐 전해주고자 했던 주님인 것처럼, 참된 순례길인 우리 일상에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주님을 향해 온 몸으로 걷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 성인이시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의 ‘길’이요 저희의 ‘까미노’이심을 저희 죄인들이 깨닫게 전구하여 주소서.”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스페인 라바날 델 까미노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사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