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인터뷰】 사제 수품 60주년 - 성 베네딕도회 진 토마스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8월 23일)

procurator 0 1,876 2020.08.24 10:43

말씀의 봉사자로 살아온 60년… 


“주님, 감사합니다” 


사제 수품 60주년 - 성 베네딕도회 진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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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일 낮기도 중 시간전례(성무일도)를 바치는 진 토마스 모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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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성 베네딕도회에 입회하기 전 진 토마스 모어(오른쪽) 신부를 비롯한 4남매가 한 자리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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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왜관수도원 성당에서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기념 촬영을 하는 진 토마스 모어(왼쪽에서 두 번째) 신부.


성 베네딕도회 화순수도원 진 토마스 모어(Joseph Wilhelm Timpte, 한국명 진문도, 87) 신부. 

세상에도, 교회에도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독일 오버하우젠 출신 선교사인 그는 알만한 사람은 아는 ‘말씀 봉사자’다. 수도자들은 물론 교구 사제들도 그에게 피정 지도를 받은 이가 한둘이 아니다. 

1962년 초 한국에 들어와 58년을 한결같이 성경, 특히 시편과 수도생활 전반, 교회사 강의, 피정 지도에 힘쓴 진 신부가 20일로 사제수품 6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16일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분원인 화순수도원 성당에서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축하 미사를 봉헌했고, 20일 본원인 왜관수도원 성당에서도 축하 미사를 봉헌했다. 6일 화순수도원 성당으로 그를 찾아갔다. 

사제수품 60주년을 맞는 소감부터 물었다. 진 신부는 “내 인생은 이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결정은 1954년의 첫서원 때였다”며 “1957년 종신서원은 첫서원에 대한 확인이었을 뿐”이라고 답변했다. “그만큼 첫서원은 제 삶에서 중요하고 결정적인 날이었다”면서도 “그렇지만 다른 분들께는 사제서품식도 의미가 있기에 사제수품 60주년 미사를 봉헌하게 됐다”고 담담히 설명했다. 

진 신부는 사제로서의 삶 60년 중 58년을 한국에서 살았다. 그래서 왜 한국에 왔느냐는 질문을 하자 그는 “한국엔 오고 싶지 않았다”고 뜻밖의 답변을 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어요. 첫 번째 이유는 한국말이 정말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노예장사를 하던 아랍 상인들이 만든 반투어족 계열 스와힐리어는 몇 달만 공부하면 읽고 쓰는 데 무리가 없고, 강론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선배 선교사들이 한국어는 선교하지 못하게 하는 말이라는 농담을 할 만큼 어려웠어요. 두 번째 두려움은 추위였죠. 덕원이나 연길에 파견됐던 우리 선배들은 난방이 안 돼 벽돌을 데워서 제대 위에 올려놓고 손을 녹여가며 미사를 집전했다고 해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그렇게 춥지는 않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마음속에만 간직했다. 총아빠스가 그를 불러 “(선교지로) 한국을 생각해 보라”고 하자 그는 두말없이 순종했다.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1961년에 ‘현대 토미즘에서의 종교 체험’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나서 훗날 탄자니아 페라미호수도원에 가서 철학을 가르치려던 꿈을 접고 그는 한국으로 왔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부산까지 오는 42일간의 여행은 재밌는 휴가와도 같았다. 매달 한 번씩 부산에 화물차를 몰고 와서 구호물자와 건축자재, 기계 등을 가져가던 수사들과 함께 진 신부는 왜관수도원에 왔다. 그리고 서강대에서 예수회원들과 함께 한국어를 배우고 58년을 살았다. 그래서 이젠 출생지 독일보다 왜관이 고향이라고 그는 털어놓는다. 

첫 소임인 왜관본당 보좌 9개월, 구미본당 임시 주임 18일, 상주 서문동본당 주임 2년, 왜관 석전본당 주임 1년 6개월이 본당 사목의 전부였다. 그보다는 그는 왜관수도원 수련장으로 오래 살았다. 장장 15년간이었다. 그동안 100명의 수련자를 맡았다. 

“정말 어려운 자리였어요. 33세에 수련장을 했는데, 한국에 파견됐던 때보다 더 힘들었어요. 제가 내보낸 수련자도 9명이나 돼요.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결정이었겠어요? 수련을 마치고 남은 수도승이 34∼35명쯤 됩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수도생활의 기쁨, 특히 베네딕도 성인의 영성을 전하는 기쁨이야 컸지요. 제일 기억나는 반이 박현동 아빠스를 비롯해 여덟 분이 있었던 반인데, 지금은 다섯 분이 남았네요.” 

소임을 하는 중에도 진 신부는 ‘말씀 봉사자’로서의 소명을 잊지 않았다. 1년이면 적어도 예닐곱 차례 수녀원 연피정이나 교구 사제 피정을 지도했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피정 지도를 거의 하지 못했다. 다만 지난 1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녀회 모원에서 예정됐던 피정을 취소하고 일부 수도자들에게 강의만 했다. 

이어 요즘 근황을 궁금해했더니 진 신부는 “그냥 삽니다” 하고 짧은 답변만 했다. “그냥 살고 기도하고 2주일에 한 번씩 강론하며 지냅니다. 지난해에는 총 3부 24개의 담화로 이뤄진 「요한 카시아누스의 담화집」 출판 준비를 하느라 지루하지 않게 지냈어요. 요한 카시아누스는 서구 수도생활의 영적 기초를 다졌고 큰 영향을 미친 교부인데, 신부님들도 잘 몰라서 라틴어 원본에 충실하게 번역해 한국베네딕도회 수도자 모임에서 펴내는 연간지 「코이노니아」에 실었고, 그 원고를 다듬어 조만간 출간할 예정입니다.” 

끝으로 한 말씀 남겨달라고 진 신부에게 부탁했다. 그는 “1944년 2차 세계대전 중, 제가 12살 때 피란 중에 어느 신부님께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2장 9절의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 두셨다’(2코린 2,9)는 내용의 그 말씀은 지금도 항상 제게 위로를 주고 희망과 기대를 준다”면서 “지금도 행복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제 인생, 세상 떠난 뒤에 하느님께서 마련해두신 더 좋은 세상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60년을 말씀의 봉사자로 사는 사제가 될 수 있었던 건 제게 정말로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