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公所)] 17. 대구대교구 왜관본당 삼청공소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질병이 바로 한센병이다.(탈출 4,6; 2열왕 5,1; 2역대 26,21; 마태 8,2; 루카 5,12 참조) 최근까지 사람들은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한센병을 하느님의 징벌이라고 여겼을 정도다. 그래서 고대와 중세의 한센인들은 사람들이 자기 곁으로 오면 “나는 부정하다”고 외치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한센병은 그리스도교와 친숙한 병이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한센인들을 치유해주신 것처럼 교회도 그들을 치유하고 함께 사는 일에 헌신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원에서 그 일을 맡아 하고 있다.
13세기 영국 연대기 작가이며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매튜 패리스는 당시 유럽의 수도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해 돌보던 곳이 1만 9000여 개나 됐다고 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한센인들의 격리시설을 루카 복음 16장 19-31절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인용해 ‘라자렛’이라 불렀다.
한센인 정착촌에 자리한 공소
경북 칠곡군 삼청5길 70 현지에 자리 잡고 있는 왜관본당 삼청공소는 대구대교구에서 첫 번째로 세워진 한센인 정착촌 베타니아원 내에 있는 공소이다. 삼청공소는 교회의 전통대로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한센인들을 돌보고 있는 라자렛이다.
삼청공소를 소개하려면 세 명의 선교 수도승들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호노라토 밀레만(Honoratus Milemann, 한국명 남도광, 1903~1988)ㆍ세바스티아노 로틀러(Heunrich Sebastian Rotler, 한국명 임인덕, 1935~2013)ㆍ알빈 슈미트(Alwin Schmid, 한국명 안경빈, 1904~1978) 신부이다.
남 호노라토 신부는 베타니아원을 조성한 사제다. 그는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에서 북한 덕원수도원으로 파견된 마지막 선교사이며 왜관수도원으로 재파견된 첫 번째 덕원 선교사였다. 신학박사였던 그는 덕원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다 1949년 북한 인민군에 체포돼 5년간 중강진 옥사덕 강제 수용소 생활을 하다 독일로 송환됐다가 1955년 5월 입국했다.
그는 불쌍한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불쌍한 이들인 한센인을 돌보는 일이 왜관수도원 공동체의 특별한 소명임을 자각했다. “수도원과 본당에서 얼마나 많은 돈과 옷, 의약품들을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들에게 제공했는지는 계산할 수도 없고 계산해서도 안 된다. 우리 선교 지역 내의 한센인들에 대한 우리의 활동은 공공사회사업 성격을 띤다. 우리가 선교하는 경상도는 예부터 한센인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다. 1955년 내가 남한에 와서 한센인과 인연을 맺을 무렵 남한의 한센인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이 지역에는 사회에서 소외되어 떠돌다가 다리 밑에서 하루하루 구걸로 연명하는 한센인들이 있었다. 더러는 아편에 중독되고 자살하는 한센인도 있었다. 우리는 뭔가를 해야 했다. 몇 년 후 우리는 네 곳의 한센인 정착촌에서 700여 명의 한센인을 돌보게 됐다. 그들 중 90% 정도는 병의 진행이 멈춘 상태다.”(「분도통사」 1578~1579쪽, 호노라토 밀레만 신부 사회사업 성과 보고)
빛이 된 세 명의 선교사
남 신부는 1959년 독일 신자들이 보내온 기금으로 왜관 삼청동 일대 농지 5만 평을 사들여 한센인 가구당 200여 평씩 나눠줬다. 그리고 집도 20여 동 지어줬다. 또 양계업을 위한 삼청동 농장을 지어 베타니아원 전체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공소와 진료실도 마련했다. 한센인들에게 매주 1회씩 무료 진료를 했고, 예수의 작은 자매회와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원 수녀들을 초청해 환자들을 돌보게 했다. 1968년부터는 의사 출신인 디오메데스 수녀를 초빙해 한센인 진료를 맡겼다. 남 신부의 노력으로 베타니아원 한센인들은 음성 환자로 바뀌었고, 정착촌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더는 감염이 없었다.
남 신부에 이어 베타니아원 삼청공소 사목을 임 세바스티아노 신부가 1980년대 초부터 맡았다. 그는 베타니아원 아이들의 교육에 헌신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과정을 따로 공부한 후 매원초등학교를 거쳐 왜관수도원이 운영하는 순심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성적도 우수했다. 임 신부는 아이들에게 놀이와 연극을 가르쳤고, 여름밤이면 영사기를 가져와 영화를 보여줬다. 또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로 산으로 여행을 다녔다. 임 신부는 삼청공소에서 한센인 정착촌 아이들에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희망을 심어줬다.
임 신부는 또 베타니아원 도로를 포장하고 우물을 파서 양계장과 돼지 축사에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미국 구호단체 원조를 받아 어려운 신자 가정부터 300만 원씩 무이자 3년 기한으로 빌려줬다. 한센인들은 이 자금으로 닭과 돼지를 사서 축사와 양계장을 늘렸고 모두 3년 만에 상환했다. 베타니아원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다 선종한 남 신부와 임 신부를 기리기 위해 송덕비와 추모비를 세웠다.
알빈 신부는 삼청공소를 설계하고 성당 벽화를 직접 그렸다. 알빈 신부는 국내 약 180여 개 건축물을 설계했지만, 그가 직접 벽화를 남긴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알빈 신부는 1937년 한국 선교사로 연길수도원에 파견됐다. 그는 1946년 중국 공산 당국에 의해 두만강변 남평수용소에 투옥된 후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1949년 독일로 추방됐다. 1961년 왜관수도원으로 재파견된 그는 왜관수도원에서 약 4㎞ 떨어진 베타니아원 언덕 위 가장 높은 곳에 삼청공소를 지었다. 그리고 제단 벽면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그렸다. 참 행복은 세상이 아니라 주님께 위로를 받는 것이며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담고 있다.
6ㆍ25 전쟁 후 북한 덕원 땅에서 남한 왜관에 정착한 성 베네딕도회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도원이었다. 당시 왜관에서 전기와 수돗물은 드문 사치품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대중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 심화시키는 ‘비천한 사도직’이었다. 그 대상자 중 가장 빛나는 이들이 바로 한센인이었다. 삼청공소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눈먼 이들에게 빛이 되기’ 위해 덕원과 연길, 왜관수도원에 파견된 세 명의 선교사가 가장 버림받은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군 신앙 공동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