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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 중 (2020년 7월 12일, 가톨릭평화신문)

procurator 0 842 2020.07.13 09:32

해성학교·덕원의원 등 다양한 선교로 교세를 넓히다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중>


2020.07.12 발행 [15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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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봄부터 당국의 인가를 받아 외과와 내과 진료를 할 수 있는 진료소 덕원의원을 개원한 요셉 그라하머 수사가 환자들과 함께 수도원 현관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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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초 덕원인쇄소에서 일하는 루도비코 피셔 수사와 강 세바스티아노 수사 등. 1929년 소련이 소ㆍ만국경에서 분쟁을 일으키자 의란 자치 선교구에서 성당을 건축하던 일데폰소 플뢰칭거 수사가 덕원수도원에 돌아와 성탄을 앞두고 교회 광고지를 인쇄한 것이 덕원인쇄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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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산대목구 주교좌 원산본당 미사 전경. 1938년에 신축된 원산성당은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 성당을 참조해 설계됐는데, 내부에 기둥이 없어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성당 뒤쪽에 앉은 신자들도 제대를 잘 볼 수 있었다.



원산대목구 선교의 견인차, 해성학교 


“내가 원산에 온 지 14년이 됐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개항 이후 가톨릭은 원산에서 40년이나 선교했는데도 신자 수는 150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이 도시엔 이제 가톨릭 신자가 1500명이나 되고, 예비신자 또한 800명이나 된다. 교회와 직ㆍ간접으로 연관된 사람은 1만여 명이나 된다.…”  


원산의 가톨릭 교세가 급격히 늘어난 비결은 뭘까? 1921년 베네딕도회 선교사들과 함께 원산에 왔던 해성학교 부교장 오병주(요셉)는 이렇게 교세가 늘어난 원동력이 “학교에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학교 교육을 통한 장기적 선교 계획이 세워졌고, 본당마다 세워진 해성학교는 선교의 결정적 견인차가 됐다. 


1921년 5월 원산 해성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23년이 되면 36개 학교에 2080명이 재학했다. 1940년 함흥대목구와 덕원자치수도원구가 분리되기 이전 마지막 원산대목구 교세 통계를 보면, 인가학교 12개교에 남녀 학생 5159명(신자 913명)이, 미인가 15개교에 1425명(신자 723명)이 재학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 국내 학교 중 가장 많은 박사 학위 소지자를 보유했던 덕원신학교는 사제ㆍ수도 성소 발굴과 함께 교육 활동에도 활발하게 나섰다. 

학교 운영과 더불어 시약소와 병원을 중심으로 한 의료사도직도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5년 11월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요청에 따라 원산에 파견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시약소’를 통해 병자들을 돌봤고, 본당 내 야학과 노인ㆍ아동을 위한 교리강습소, 농아학교, 해성유치원 등을 통해 본당 사목에도 협력했다. 이뿐 아니라 1928년 5월 요셉 그라하머 수사와 김재환(플라치도) 수사를 주축으로 덕원수도원에서 개원한 ‘덕원의원’은 1년 만에 1만 8800여 명을 치료하는 성과를 거뒀고, 1930년대 중반엔 덕원의원을 증축, 진찰실과 전기 방사선실, 수술실, 병실, 입원실 등도 갖추고 의료 사목을 본격화했다. 


수도원 이전 후 출판·농공 선교 전개

덕원으로 수도원을 이전한 뒤 출판, 인쇄를 통한 선교도 전개됐다. 덕원인쇄소는 등사판 「미사 통상문」(1932년)과 한글판 「미사규식」(1933년), 「미사경문」(1933년) 등을 발간했고, 기타 성사 안내서와 시간전례서(성무일도서), 기도서, 교리서, 신심 서적 교리교재도 다양하게 간행함으로써 선교의 밑거름이 됐다. 1933년 6월 창간한 「가톨릭청년」지는 선교와 함께 한글애용ㆍ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고, 이 때문에 창간 3년 만에 폐간되고 만다. 

농공 활동 또한 눈부셨다. 서울 백동수도원에서 기초를 닦은 목공장과 철공장, 농장은 수도원이 덕원으로 옮겨와서도 그대로 유지됐고, 제분소도 들어섰다. 육림과 원예, 양봉 사업과 함께 자물쇠공장, 칠공장도 새로 운영했다. 

원산대목구는 이처럼 활발한 선교로 1927년 8월이 되면, 14개 본당, 176개 공소에 신자 수 1만 4000여 명, 예비신자 또한 1000명을 헤아렸으며, 성직자도 28명, 수도자도 50명이나 됐다. 


연길·의란 선교지의 분리

그러나 원산대목구의 활력은 상당 부분 연길ㆍ의란 선교지의 활력에 힘입은 바 컸다. 특히 연길 선교지는 1928년∼1929년 사이 성직자 수 15명에 신자 수 1만 2000여 명, 예비신자 582명, 본당 8곳, 공소 147곳이나 됐다. 의란 선교지도 부금, 가목사 2개 본당에 1272명이 신앙생활을 했다. 연길과 의란 지역 신자 수는 함경도 신자 수보다 5∼6배나 많았다. 이에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이 지역을 분할하기로 하고, 관련 자료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이에 따라 교황 비오 11세는 1928년 7월 3일 자로 중국 흑룡강성 일대를 ‘의란 지목구’로 설정하면서 사우어 주교아빠스 관할 아래 뒀고, 같은 해 7월 19일 자로 북간도를 연길지목구로 설정, 원산대목구에서 분리했다. 이어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은 1933년 9월 1일 자로 의란 지목구를 티롤의 카푸친회 북부관구에 위임했다. 

연길ㆍ의란 선교지가 분리됐음에도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당시 늘 부족한 재정으로 노심초사했다. 1929년 「경향잡지」(통권 제23권)를 보면, 당시 원산대목구 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 수 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은 태산과도 같습니다. 수도원과 수녀원, 신학교, 해성보통학교 건물은 완공했지만, 덕원수도원 성당과 원산대목구 주교좌 성당, 나남과 청진 등지에도 성당을 지어야 합니다. 또한, 해성보통학교 여자부 교실도 신축해야 할 터인데, 자금이 궁핍합니다. 교구 신자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교우가 기구와 희생으로 도와주시길 간청합니다.” 

앞선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으로 모원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어려움에 처한 데다 1920년대 말에 불어닥친 세계 공황으로 원조가 줄어든 것이 원인이었다. 

두 선교지 분리 이후 원산대목구는 1929년 6개 본당에 2252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에도 원산대목구는 영흥(1931년)ㆍ고원(1933년)ㆍ북청(1935년)ㆍ흥남(1935년)ㆍ나남(1936년) 본당을 차례로 설립해 다시 선교에 박차를 가한다. 이 무렵 주교좌인 원산본당에선 신자 수가 증가하자 1938년에 새 성당을 신축했으며, 청진본당에선 1931년에, 흥남본당에선 1936년에 각각 성당을 신축했다. 

1940년이 되면, 원산대목구는 총 11개 본당에 89개 공소, 신자 수 1만 1064명에 이른다. 연길ㆍ의란 선교지 분리 이후 7분의 1에 가깝게 줄었던 교세가 12년 만에 다시 5배가 늘어나는 폭발적 증가세를 보인 것이다. 성직자 수 또한 16명에서 35명으로 늘었는데, 이 중에는 한국인 사제도 5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1937년 3월과 4월에 사제품을 받은 임화길ㆍ김보용ㆍ최병권 신부와 1940년 3월에 사제품을 받은 이재철ㆍ구대준 신부가 그 주인공이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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