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에서의 시간은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사방이 조용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떼 지어 날아오르며 경쾌한 합창을 하는 새들의 지저귐 외엔 소리가 사라진 공간인 듯 고요했다.
더 다양한 악기를 갖추고, 더 크고 높은 소리로 찬양을 하고, 더 재미있는 설교로 교인들을 휘어잡는 담장 밖 요즘 교회들은 아랑곳없이 미사 시간에도 중저음 바리톤 소리만 가득하다. 그러나 파이프 오르간 하나의 반주에 맞춰 70여 명의 수사들이
부르는 미사곡은 조용히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듯 했다. 수도원의 그런 고요함이 세상이 아닌 나를 돌아보게 하고, 인간이 줄 수 없는 위로를 내게 주었다. 소박한 즐거움을 주는 시간 중의 하나는 식사시간이었다. 아침은 토스트와 잼, 몇 가지 과일과 소시지, 삶은 달걀 등이 뷔페식으로 나왔다. 그 중 수사들이 독일에서 직접 배워 와 만든다는 독일식 소시지는 굽지 않고 얇게 저며 빵에 얹어 먹는데, 소시지 하면 으레 떠오르는 인위적인 맛이 아니라 슴슴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인터넷 주문이 넘쳐난다고 한다. 점심은 간단한 반찬 몇 가지를 갖춘 볶음밥 같은 일품요리, 저녁은 국과 밥, 몇 가지 손이 많이 가는 반찬까지 갖춘 정찬이 나온다. 특히 밥이 윤기가 흐르면서 찰지고 고소하다. 수도원 부지보다 넓은 논에서 수사들이 직접 농사 지은 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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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저녁밥상, 수사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쌀로 지은 밥이 특히 맛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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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는 요 앞방에 역사관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식사 마치시고 둘러보세요. 그 유명한 겸재 정선 그림도 있고 베네딕토 수도회의 역사도 잘 전시돼 있어요."겸재 정선 그림이 수도원에?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겸재와 수도원'의 조합이 흥미를 끌었다. 역사관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진짜 교과서에서 보던 겸재 정선의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다.
생전에 금강산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자주 그렸다는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전도>를 비롯해 <진경 산수화> <인물 산수화> 등 교과서에서 많이 보던 그림들을 눈앞에서 보니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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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관수도원에 걸려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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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그림과 왜관수도원의 인연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상트 오띨리엔 수도원장이었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1908년 두 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 최초의 남자수도원인 베네딕도 수도원을 만든 인물로,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직접 조선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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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인류학자이자 성 오띨리엔 수도원장이었던 베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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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갈 때 겸재 정선의 <21폭 화첩>을 사가지고 갔다. 이 그림을 '오띨리엔 수도원' 측에서 계속 보관해 오다가 한국 학자에 의해 이 그림이 한국에서 국보급의 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한국 진출 100주년이 되던 2005년, 왜관 베네딕토 수도회로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려주게 된다.
국보급 문화재의 귀환이 화제가 되면서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영인본 형태의 그림을 수도원 역사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겸재 정선의 화첩을 사가지고 갔던 베버 신부, 그가 1911년 조선을 처음 찾았을 때 제일 먼저 안중근 의사의 본가인 황해도 신천군을 찾아가 안 의사 유가족의 사진을 찍어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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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버신부가 찍은 안중근의사 유가족의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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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는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은 천주교도이기도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유족을 찾아가 사진을 남겼으니, 그의 역사의식을 짐작할 만하다.
신부인 동시에 문화인류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조선에 머무는 4개월 동안 조선의 풍습과 다양한 문화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남긴다. 그리고 1915년 독일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습이 놀랍도록 생생히 남아있는 그 책에서 베버신부는 '조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토록 빨리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나라, 조선."
- 노르베르트 베버
그는 돌아간 뒤 자신이 소속된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선교사들을 계속 조선으로 보낸다. 처음에는 한양에서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1920년 원산교구로 이동을 한다. 함경남도 원산 외곽, 덕원 일대 150만평의 땅에 붉은 벽돌로 세련된 수도원을 짓고 유치원과 학교를 만들었다.
독일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일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원리에 맞게 목공소와 인쇄소, 의료기관까지 세운 이들은 가난한 신자들을 구제하는 활동에 앞장선다. 역사관에 전시돼 있는 당시 함경남도 덕원 수도원의 사진들은 놀랄 정도로 현대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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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경남도 덕원에 있는 성베네딕도 덕원 수도원 본당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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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기쁨으로 사역하던 이들에게 1950년 한국전쟁은 참혹한 시련기를 안겨준다. 소련군과 함께 수도원을 점령한 북한군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믿는 신부와 수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도원의 모든 것을 빼앗은 뒤 신부와 수녀들을 옥사덕 수용소로 끌고 갔다.
왜관 수도원 본당 앞에 있는 한 장의 그림은 당시 베네딕도 수도원이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역설적으로 그림 동화처럼 담담하게 표현해 놓아 더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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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순교자 38위, 독일신부와 수도자 23명, 한국신부 11명, 원산수녀원소속 수녀 3명, 봉헌자 1명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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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과 공구함을 들고 있는 목공 담당 수사, 인쇄 담당 수사, 농기구를 들고 있는 농사 담당 수사, 의약품을 담당했던 수녀, 이들 모두는 옥사덕 수용소에서 순교하거나 총살당한다.
당시 순교한 사람들은 독일인신부 및 수도자 23명, 한국인 신부 11명, 그리고 원산수도원 소속 수녀 3명과 봉헌자 1명등 모두 38명이었다. 이들의 참혹한 이야기는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 잘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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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원 수도원 38명 순교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왜관수도원 본당 복도에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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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먼저 죽은 이들을 부러워할 정도로 참혹했던 수용소에서 '죽는 은총'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서 모든 고초를 겪은 이들, 다행히도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노력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끝났다면 이야기는 그저 평범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난다. 함경남도 덕원을 떠나 독일로 갔던 신부들 중 건강을 회복한 신부 10명은 1956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다.
이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다. 그들은 왜 38명의 동료를 순교로 잃은 끔직한 땅, 여전히 전쟁의 위험이 가득한 땅으로 돌아올 용기를 냈던 것일까?
"하느님은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계시된다."
- 유대인 사상가 에마뉘엘 레비나스 아마 그 시기,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것이 부서지고, 모든 이가 헐벗고, 정신적으로 어둡고 추운 밤을 보내는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돌아온 그들은 조선인 수사들과 함께 다시 인쇄소를 세우고, 목공소를 만들고, 학교를 세운다. '일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도의 정신에 맞게 끊임없이 손을 움직여 노동하고, 틈틈이 기도했다.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사진작가 최민식의 책을 비롯해 많은 출판금지 책들을 찍어내며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과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일조를 했다.
'격동'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년의 굴곡진 역사가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이 공간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내가 왜관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하룻밤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기까지 이렇게 많은 이들의 희생과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 놓여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숙연해진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해 내는 이들을 볼 때 신앙의 놀라운 힘을 느끼게 된다.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있는 12월,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우리나라에서 걸어온 지난 100년의 동행을 되새기면 성탄절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