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건축가 알빈 신부 (상)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4일)

procurator 0 3,159 2016.09.12 00:03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건축가 알빈 신부 (상)

우리나라 상황 맞는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성당 설계

가톨릭신문 2016-09-04 [제3010호, 13면]

 

 

독일서 연길교구에 선교사로 입국

1946년 공산군에 체포돼 감옥살이도

‘대면식 미사’에 관심가져 설계에도 반영

문경 점촌성당… 토착화 성당으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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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빈 슈미트 신부(1904~1978).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로 살아왔던 수도회의 크고 작은 봉사 중에서 건축・예술 선교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독일 태생의 알빈 신부님이었습니다. 알빈 신부님은 전례, 건축, 미술, 신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겸손하고 인간미 넘치는 인품으로 수도원 식구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북간도 연길교구에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하였고, 공산 정권에 의해 감옥 생활도 하였으며, 독일로 추방된 후 스스로 건축가로 변신했습니다. 왜관 수도원에 다시 돌아와 건축설계와 미술작업을 했는데, 20년 동안 무려 185개에 달하는 가톨릭 건물을 설계했다 합니다.”(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 신부, 「건축가 알빈 신부」(2007) 추천사에서)

 

알빈 슈미트 신부(Alwin Schmid, 1904∼1978)는 1904년 독일 남부 슈바벤(Schwaben) 지방 슈파이힝엔(Spaichingen)에서 태어났다. 라벤부르크(Ravenburg)와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1927년에 뮌헨대학에 입학해 미술사를 전공했다. 또 베를린 프리드 빌헬름(Friedr Wilhelm)대학과 빈(Wien)대학에서 조형미술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31년 5월 성 오틸리엔 베네딕도 연합회(Congregatio Ottiliensis Ordinis Sancti Benediciti) 소속의 독일 뮌스터슈바르작(Münsterschwarzach) 수도원에 입회했으며 이듬해인 1932년 첫 서원을 했다. 당시 그는 니체의 니힐리즘(nihilism)에 심취해 수도원을 떠나는 등 가톨릭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방황하기도 했고,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도 공부했다. 1936년 3월 1일 사제품을 받았으며, 서품된 지 1년 후 한국 선교사로 임명됐다.

 

1937년 5월 6일, 알빈 신부는 한국인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던 만주 북간도의 연길(延吉)교구에 파견됐다. 알빈 신부는 간도에 도착하자마자 연길 임시성당의 장식을 담당했고, 용정 하시성당의 내부 수리를 맡았다.

 

1년 동안(1938~1939)은 용정 상시본당의 주임으로 사목하다 1939년에 용정 하시본당 보좌로 임명됐다. 그러나 원래 언어에 소질이 없었던 그는 어려운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해 일반 사목 분야에서는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1940~1945년 사이에 돈화성당, 명월구성당, 연길성당 등을 설계했다.

 

그중 돈화성당(1942)은 근대적인 개념의 성당 건물로 제대를 벽에서 옮겨 독립시키고 감실은 제대 뒤쪽의 반원형 벽감에 붙박아 놓았다.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서 미사를 드릴 수도 있고 예전처럼 신자를 등지고 드릴 수도 있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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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군에 체포된 알빈 신부는 1948년 남평수용소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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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빈 신부가 1959년 설계한 점촌성당. 한국상황에 맞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시 1943년 9월부터 용정 상시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알빈 신부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20일에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공산군에 체포돼 남평(南平)과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다 1949년에는 결국 독일로 추방됐다. 그는 감옥에서 수감생활 중의 장면을 연필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연길 교구장 브레허 주교는 벨기에와 독일에서 시작된 전례운동을 지지했는데, 신자들이 전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미사경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특히 1932년에는 ‘신자들을 향한 미사’를 도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 공식화되고 보편화된 이른바 ‘신자들을 향한 대면식 미사’는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고, 알빈 신부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1949년 독일로 추방된 알빈 신부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로서 미술과 제도를 강의하면서 벽화제작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교회 건축 설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의 건축개념이 당시로서는 너무 혁신적이어서, 바로크 양식을 옹호하던 당시 독일 수도원 책임자들에겐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 전 이 12년 동안이 그에게 있어서는 교회건축가로 변신하는 준비 기간이 됐다.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건축 사업을 활발히 펼쳤으며, 전례운동과 근대건축운동의 선두에 섰던 독일에선 전통적인 양식의 교회건축에서 벗어난 새로운 개념의 다양한 교회건축이 루터파 교회와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알빈 신부는 가톨릭전례와 도상학(圖像學, Iconography)을 연구하고 설계에 적용했던 루돌프 슈바르츠(Rudolf Schwarz, 1897~1961)와 그의 작품에 깊이 심취했다.

 

알빈 신부는 이미 간도에서의 사목시절, 당시로서는 교회에서 공인되지 않았던 대면식 미사를 드리기도 하는 등 전례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에 관한 실천적인 작업으로 교회건축의 배열과 새로운 도상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했었는데 담 신부(F. Damm, 卓世塋, 1900~1964)의 요청으로 1958년 김천 평화성당을 설계하게 됐고, 이듬해에는 렌하르트 신부(A. Lenhard, 盧)의 의뢰로 문경 점촌동성당을 설계했는데, 한국적 상황에 맞춘 실용적 설계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에는 지베르츠 신부(E. Siebertz, 지)의 요청으로 가은성당(1961.4~1961.11)을 설계하고, 부산 분도병원 성당도 설계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12월 15일 한국에 재입국해 왜관 수도원에서 본격적으로 건축설계와 미술작업을 하게 된다.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학과 교수)

서울대 건축학과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단국대 건축학과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문화재청이 위촉하는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