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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칠곡 왜관수도원에서 만난 소설가 공지영. 그는 최근 펴낸 ‘수도원기행2’에 “거저 받는 이 사랑을, 거저 받은 이 모든 축복을 만 분의 일이라도 내 이웃들과 나누고 싶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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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출판사에서 공지영(52)의 ‘수도원기행2’가 나온 지 한 달쯤 지났다. 13년 전 나온 전작과는 작가의 신앙고백이 가림막 없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소설가’ 공지영은 내려놓고 ‘신앙인’ 공지영으로 집필한 책이다. 그네는 이 책에서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한갓된 사랑 대신 신의 사랑을 구한 그네를 따라 지난해 말 독자들과 더불어 왜관수도원에 갔다.
“전편에서는 수위 조절을 했는데 사람들이 의외로 진짜 하느님이 있느냐고 물어요. 지금까지 내가 낸 책들 중에서 여전히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수도원기행’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살기 어려워지니까 영성을 찾는 걸까요? 세상이 사람들을 너무 절망과 죽음으로 내몰아요.”
100여년 전 한국에 진출한 경북 칠곡군 왜관읍 베데딕도회 수도원은 겨울 하오의 석양 아래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일하다가 종소리가 들리면 대성당으로 달려가 기도하길 하루 다섯 차례나 반복하다 잠이 드는 수도자들의 단순한 삶이 깃든 곳이다. 침대와 목제 책상만 놓인 단출한 ‘손님방’에 여장을 풀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지는 해의 빛이 아늑하다. 수사들이 일하는 스테인드글라스와 금속공예 공방을 둘러보고 저녁 끝기도가 노래로 봉헌되는 시간에 성당 대신 응접실에 공지영과 마주 앉았다.
“대중을 상대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신경 안 쓰고 진짜 신앙인 공지영으로 내려가 쓴 책입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교회보다 크고 종교보다 큰 분이라서 상관 없어요. 신의 존재를 믿고 난 다음부터는 돌멩이 하나도 그게 의미가 있게 보이더라구요. 작가로서 의미 있는 깨달음이지요.”
작가가 지나치게 종교적으로 경도되면 작품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었다. 에둘러 물어보려다 먼저 답을 듣지 않으면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답답할 것 같아 댓바람에 물어본 터였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을 필두로 미국과 유럽의 10개 수도원을 돌며 자신의 삶과 신앙을 삼투시킨 이번 책은 그 자체로 훌륭한 인문서이자 세속의 절망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만 곳곳에서 덜컥거리는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다. 신비체험과 결부된 초월적 세계에 대한 그네의 진지한 고백 때문일 터이다. 큰 사랑에 대한 종교적 고백은 세인들도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지만 세찬 (성령의) 바람에 몸이 솟구치고 비명을 지를 만큼 통증을 일으켰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네의 말마따나 ‘할렐루야 아줌마’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체험을 한 건 벌써 10여 년 훌쩍 지난 일입니다. 그동안 내가 종교적으로 경도된 ‘이상한’ 작품을 썼나요? 이번에 솔직하게 고백한 것뿐이지 주변에서 걱정하는 것만큼 작품에서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평화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공지영은 본디 가톨릭 신앙을 지니고 있다가 대학에 들어가 ‘냉담’을 한 터였다. 18년 만에 그네가 다시 교회로 돌아간 과정은 서문에 나와 있거니와 눈물겹다. 지극한 고통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지 않는 한, 절망의 끝자락까지 가지 않는 한, 적어도 그렇다고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제대로 신을 붙들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공지영은 남편에게 구타를 당한 뒤 ‘커다란 대추를 물고 있는 것처럼 부어터져서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찬바람이 자꾸 스며들어’ 이를 딱딱 부딪치며 돌 지난 아이를 업고 경찰서에 갔을 때를 서문에 고백했다. 가장 비굴한 자세로 땅바닥을 기어다니며 그에게 항복하고 만 연후에 비로소 평화가 왔다고 그네는 말한다. 항복한 그이란 그네가 찾은 새로운 사랑이다.
“나도 죽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회심을 하고 나서도 두 번이나 그런 시점이 있었어요. 신을 알고 나서도 이 세상이 싫었으니까…. 그만큼 세상이 사람들을 너무 괴롭혀요. 신을 믿는다고 무조건 행복하다면 옛날부터 신자들은 하나도 안 죽었게요?”
공지영은 첫 번째 죽고 싶은 유혹이 왔을 때는 자존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했다. 30대에 면벽을 하면서 자신이 여기까지 온 건 누구누구 잘못 만난 100퍼센트 남의 탓이었다고 쳐도 지금부터는 그들만 원망하면서 살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자각이 들었다고 했다. 아무리 밑바닥이지만 눈 감기 직전까지 자부심을 잃지 말자는 자존심이 죽음을 극복한 힘이었다. 두 번째 죽음의 유혹이 올 만큼 힘들었을 때는 폭풍 속에서 잡을 게 하나 있었기 때문에 훨씬 쉬웠다고 말했다. 그동안 사람에게 의지했지만 그들 또한 모두 고난 속에 있는 인간들인지라 인간이 아닌 하느님을 잡은 거라고 했다. 폭풍 속에서도 부유하던 그네가 튼튼한 기둥을 잡은 셈이다. 이번 책을 내고는 “공지영이 하다하다 안 되니 가톨릭 출판사로 피신해 말도 안 되는 글을 썼다”는 인터넷 댓글을 접했다. 예전 같으면 흔들릴 수도 있을 테지만 이젠 비교적 평온하다고 했다.
“안쏘니 드 멜로 신부님의 글을 기억합니다. 칭찬은 속삭임처럼 듣고 비난은 천둥소리처럼 듣는다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소리는 자연에 존재하는 겁니다. 아무리 싱싱해 보이는 나무라도 죽어가는 이파리를 매달고 있듯이 설사 누군가 나를 비난한다고 한들 그가 불행할 수는 있어도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흠모하던 안젤름 그륀 신부를 공지영은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에 가서 만났다. 책에 자세히 나오거니와 그네는 오랫동안 그리던 사제 앞에서 그때 고백했다. ‘저는 지금 세 번이나 이혼을 했고,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그 경력으로 여전히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책도 예전처럼 많이 팔리지 않고 아이들은 사춘기의 절정에 이르러 저를 힘들게 합니다. 사람들에게 속아 가진 돈을 거의 다 빼앗기고 이젠 가진 것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 편 가르기에 휘말려 온갖 비방과 악소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늙었고 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신부는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인자한 미소로 모든 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었다고 공지영은 썼다.
“돈 잘 버는 남편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면 어떤 작품도 나올 수 없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이들 학비를 벌기 위해 밤을 새워 글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작가이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너무 힘든 시절을 거쳐왔기 때문에 이 평화와 행복을 찾아 여기까지 온 내 자신이 대견합니다. 이 책으로 겨우겨우 찾아온 행복의 길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공지영은 올여름 딸이 먼저 다녀와 권유한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고,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 ‘그 꽃이 지기 전에’도 집필할 예정이라고 했다. 저녁 기도가 끝나고 독자들이 식당으로 걸어가는 발소리가 분주하게 들릴 무렵 우리는 일어섰다. 마시다 만 붉은 미사주가 아쉬웠다. 박현동 아빠스를 비롯한 왜관수도원 수도자들도 참석한 독자와의 대화가 성당 아래 작은 식당에서 이어졌다. 모두에 검은 수도복을 입은 수사 10여명이 슬그머니 들어와 합창을 시작했고, 뚱뚱한 수사 하나가 세월호의 죽음을 위무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독창했다.
이 자리에는 세월호 유족 이호진씨도 독자로 앉아 있었다. 공지영은 세월호의 죽음 앞에서 ‘수도원기행2’를 쓰기로 작심했다고 했다. 아무리 힘들게 난산 끝에 태어나도 우리 모두 탄생을 환호하듯, 죽는 과정이 아무리 안타까워도 하늘나라에서는 기쁘게 맞이할 거라는 이 책의 한 대목은 세월호를 겪은 모든 이들의 상처를 쓰다듬는 위로로 작동할 만하다. 죽은 뒤의 세상과는 별개로 헛헛한 이 세상 견디게 만드는 사랑의 말이니.
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