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성탄 르포] 군수품 대신 1만 4000명 실은 빅토리호, 생명의 항해가 이끈 ‘성탄의 기적’ (평화신문, 2015년 12월 …

procurator 0 2,377 2016.01.08 08:13
기획특집
[성탄 르포] 군수품 대신 1만 4000명 실은 빅토리호, 생명의 항해가 이끈 ‘성탄의 기적’
1950년 "메러디스 빅토리호" 
2015. 12. 25발행 [13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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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메러디스 빅토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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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모형으로 설치돼 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기념비. 당시 피란민을 배에 태우는 모습이 청동상으로 재현돼 있다.





1950년 12월 22일 밤 흥남 부두. 

살을 에는 한겨울의 바닷바람 속에 부두를 가득 메운 피란민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선장이 이윽고 말을 뗐다. 

“태울 수 있는 데까지 태워보게.”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피란민들이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보따리를 짊어진 사람부터 제보다 어린 아기를 업은 아이, 노인까지…. 군수품을 싣기로 했던 화물칸은 피란민들로 가득했고, 갑판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기름통을 제외한 모든 공간엔 사람이 탔다. “살았다!”며 호들갑 떠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말없이 몸을 좁혀 다음 이에게 공간을 내줬다. 고요한 바다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포탄 소리뿐이었다. 

다음날 오후,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운 배는 흥남항을 출발했다. 바다에 잠긴 기뢰 수천 개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배는 멈추지 않고 동해로 나갔다. 

배에는 난방 시설은 물론 화장실, 먹을 것조차 없었다. 피란민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항해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새 생명 넷이 태어났다. 미국인 선원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1ㆍ2ㆍ3ㆍ4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루가 지나자 선원들과 피란민들 눈에 육지가 보였다. 부산이었다. 그러나 그곳엔 흥남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배는 다시 남서쪽으로 키를 돌렸다. 

다음날, 배에서 또 한 아이가 태어났다. 김치5였다. 한 노파가 이로 탯줄을 끊었다. 그사이 배는 거제도 장승포항 근처 바다 위에 멈췄다. 목숨을 건 항해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배에는 1만 4005명이 타고 있었다. 피란민들은 수년이 흘러서야 자신들이 타고 온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호’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살려준 선장을 새롭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이 일을 계기로 1954년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해 마리누스(Marinus)라는 수도명을 받은 수사가 됐다. 레너드 라루(Leonard RaLue, 1914~2001)가 그의 이름이었다.  

마리누스 수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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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 바다 위에서 주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옵니다.”

군수 물자 대신 1만 4005명의 생명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도에 도착한 날은 아기 예수가 세상에 온 예수 성탄 대축일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이 사건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같은 민족끼리 총구를 겨누던 가슴 아픈 상황 속에서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난 기적. 그 기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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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건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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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탔을 땐 태어난 지 10달 된 갓난아기였습니다.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요. 하지만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 지는 어른들에게 자주 전해 들었습니다.

선장이셨던 마리누스 수사님은 당시 엄청난 체험을 하시고,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하시고 겸손되이 수도 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집안은 메러디스 빅토리호 마리누스 수사님을 비롯해 모든 관계자에게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와서 구원을 받았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큰 차원에서도 볼 필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자체를 바라보고 그로 인해 생긴 피해를 조명해야 합니다. 실제로 어머니 가족분들은 전쟁 때 아무도 못 나오셨습니다. 결국 분단되고 이산가족이 된 것이죠. 

이런 아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전쟁이라는 끔찍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전쟁이나 분열은 다시 일어나서도 안 되며,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가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과 북의 관계는 적대적으로 고착되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는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한국 주교님들이 북한 평양을 방문하신 것은 굉장히 반가운 소식입니다.

남한 사람들만의, 우리만의 성탄이 돼서는 곤란합니다. 헤어진 가족을 기억하며 함께하는 성탄이 돼야 합니다. 북한 주민과 신자, 전쟁 없는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남북이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성탄을 맞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몫이라고 봅니다.”



김영숙 수녀(예수성심전교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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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마지막으로 배에 오른 사람 중 하나예요. 15살 때 어머니, 오빠들과 함께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탔죠. 우리가 배에 올랐을 땐 이미 갑판까지 피란민들로 꽉 찬 상태였어요. 기적 소리가 울리면서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피란민들은 멀어지는 고향 땅을 바라보며 엉엉 울었답니다. 그 사이서 저도 소리 내 울었지요.

거제에 도착해서는 한 주민의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자신들도 가난하면서 피란민인 가족을 챙겨준 그분들이 참 고마웠습니다.

후에 부산에서 지내면서 세례를 받고 수녀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963년 입회 후, 독일에서 수련생활을 하던 중 성소에 큰 위기를 느꼈습니다. 매일 같이 울면서 기도했죠. 왜 그 배는 예정대로 군수품을 싣지 않고 보잘것없는 북한 사람들을 태웠을까. 그리고 왜 주님께서는 수많은 사람 중에 나를 그 배에 태우셨을까. 그제야 알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이끄심이었다는 것을요.

매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빠지지 않고 바치고 있습니다. 또 마리누스 수사님을 위해 직접 만든 기도문도 꼭 바칩니다. 개인적으로는 수사님이 성인이 되시길 바라며 기도합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선 기적 심사가 필요한데, 그때 수많은 기뢰를 피해 무사히 모두를 구한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군수품보다 생명을 우선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통해 돈 때문에 생명을 경시하는 우리 사회를 반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물이 납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은 생명을 귀하게 여기라는 주님 뜻을 따랐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뜻을 따라야겠습니다.”

다섯번째로 태어난 '김치5' 이경필(야고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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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 오기 전, 아버지께서는 할머니께 15일 뒤에 다시 오겠다 하고 배에 오르셨답니다.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아버지도 모르셨습니다. 피란 온 거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화 사진관’ ‘평화 식당’ ‘평화 상회’ 등 늘 평화를 넣어 가게이름을 지으셨어요. 전쟁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는 뜻이었죠. 아마 전쟁으로 겪은 아픔 때문에 고집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아버지 뜻을 따라 저도 병원 이름을 ‘평화가축병원’이라 했죠.

배에서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장승포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릴 적 거제에서 피란 생활할 때 큰 도움을 주셨던 분이 마산교구 박문선(1921~2008) 신부님이십니다. 못 먹는 사람들에게 옥수수 가루를 내주시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거둬 교육해주시기도 하셨죠. 마리누스 수사님이 생명을 구해 싹을 틔워주셨다면 박 신부님은 그 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물을 주고 길러주신 분입니다.

생각해 보면 태어난 것도, 죽지 않은 것도 기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또 마리누스 수사님이 계시던 뉴튼 수도원이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인수해 도움을 준 것도 주님의 기적, 미리 준비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크리스마스일수록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축복하고, 서로 존중하며 좋은 일을 많이 베풀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민간 차원의 북한 주민 돕기가 활성화됐으면 좋겠습니다.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알고,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길 바랍니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시장」에도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등장한다.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어릴 적 전쟁 중에 탔던 그 배다. 영화 속 배는 부산항에 자리 잡았지만 실제 배의 도착지는 거제도 장승포항과 지심도 사이 바다 위였다.



사연 품은 거제 장승포항 바다 

2015년 12월, 다시 찾아온 크리스마스에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닿았던 경남 거제 장승포항을 찾았다.

12월의 거제는 한겨울치고 제법 따뜻했다. 남동쪽으로 항구가 열린 장승포 앞바다에도 겨울 볕이 쏟아졌다. 넘실대는 파도에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거제는 부산에서도 남서쪽으로 약 80㎞ 떨어진 곳. 그래서인지 겨울의 스산한 풍경보다 포근한 정취가 눈에 띄었다. 길가 곳곳엔 동백꽃이 폈고, 장승포항을 둘러싼 산은 가을 산처럼 얼룩덜룩했다. 바다로 통하는 길목 방파제 양쪽에는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가 항구를 지키고 있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정박한 곳을 알리는 표지는 없었다. 다만 장승포항과 지심도 사이쯤이었다는 증언에 따라 추정할 뿐이었다. 65년 전 그날, 피란민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상륙정으로 옮겨 타 거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거제 주민들은 오갈 데 없는 피란민들을 받아줬다.

피란민들은 일주일 정도만 신세를 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 상황이 좋아지면 흥남으로 돌아가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기적 항해의 끝은 기나긴 이별이었다.

거제 유적공원에 모형으로 당시 모습 재현 

수많은 생명을 싣고 달린 배는 어떻게 됐을까. 1993년,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중국에 고철용으로 팔려 분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서 모형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공원에는 배 모형과 더불어 흥남 철수 당시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들도 있었다. 피란민들은 그물을 기어오르거나 사다리를 타고 필사적으로 배 위로 오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앞엔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흥남부두에 남겨진 피란민들이었다.

실제로 당시 흥남부두에 모였던 피란민은 약 10만 명. 그중 1만 4000명만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배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메러디스 빅토리호 출발 후 미군이 흥남부두를 폭파했기 때문에 나오지 못한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대부분 견해다.

많은 사람이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를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은총이라 말한다. 하지만 기적처럼 1만 4000명을 구할 때도, 바다 위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때도, 한반도는 전쟁 중이었다.

다시 예수 성탄 대축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분단 70주년을 넘기려 하고 있다. 그날의 기적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중요한 가르침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글ㆍ사진=백슬기 기자 jdar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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