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두 손 모으니 마음의 평화…가톨릭 피정 체험 (중앙일보, 2016년 8월 26일)

procurator 0 2,951 2016.09.02 08:34
[커버스토리] 기도하고, 땀 흘리고…가까이서 찾은 힐링

[출처: 중앙일보] [커버스토리] 기도하고, 땀 흘리고…가까이서 찾은 힐링
 
 
두 손 모으니 마음의 평화…가톨릭 피정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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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은 일상을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며 심신의 휴식을 누리는 시간이다. 왜관 수도원 성당에서 기도하는 김태욱 수사의 모습.


피정(避靜)을 아시나요? 가톨릭 신자이거나 한때 성당을 다닌 적 있으시다면 낯익은 단어일 것입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 또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로, 영어로는 리트릿(Retreat)이라고 합니다. 가톨릭에서는 ‘쇄신을 위해 일상을 벗어나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성찰·기도 등 수련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오늘 week&은 피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피정의 역사는 깊습니다. 약 2000년 전 이스라엘 북부의 어촌 갈릴리에서 예수는 온종일 쫓아다니는 군중에 시달렸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는 군중을 피해 외따로이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도, 중세의 성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산으로 들어가거나 사막에 홀로 남아 고독한 수련을 했습니다. 그 전통이 2000년 세월을 거쳐 오늘도 내려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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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수도원에 있는 성 베네딕도 동상. 유럽 수도원의 창시자다.

피정은 신부·수녀·수사 같은 가톨릭 성직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종교가 다르거나 종교가없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피정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피정의 집’을 별도로 운영하는 성당과 수도원도 많습니다. 특히 수도원은 대부분 산 속에 있어서 산책하며 쉬기에도 좋습니다. 경북 칠곡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박현동(45) 아빠스(abbas·수도원장, 아빠를 뜻하는 라틴어)의 설명입니다.

“수도원 피정을 절대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누구든지 와서 깊이 기도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수도원입니다. 저희가 존재하는 것도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피정은 개인 피정과 단체 피정으로 나뉩니다. 일정은 조금 다릅니다. 개인 피정은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진행하는 미사·기도 등 일과에 참여하는 대신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냅니다.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는 수사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신청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단체 피정은 주제에 따라 일정을 새로 짭니다. 어린이·청소년 대상의 피정, 등산을 하는 피정, 요리를 배우는 피정도 있습니다. 방식이 다양해진 건 참가자가 늘어서입니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 따르면, 피정 참가자가 2006년 약 19만 명에서 지난해 28만 명으로 급증했습니다.

마침 눈여겨볼 만한 피정 프로그램도 생겼습니다. 지난해 경상북도의 가톨릭 시설 15곳이 ‘소울 스테이(Soul Stay)’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였습니다. 불교의 ‘템플 스테이’처럼 일반인을 위해 성당과 수도원의 문턱을 낮춘 것이지요.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끝이 보입니다. 여름을 잘 버텨낸 자신에게 피정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진짜 심신의 휴식을 누리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선뜻 결심이 안 서는 독자를 대신해 week&이 피정을 체험하고 왔습니다. 쉼을 누리고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 왜관수도원 1박2일 ‘소울 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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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수도원은 피정을 체험하기에 제격이다. 수사들이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고, 유서 깊은 수도원이어서 볼거리도 많다.


피서(避暑)가 간절했던 이달 초순 피정(避靜)을 체험했다. 한국 수도원 중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경북 칠곡의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였다. 왜관수도원은 공지영의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이자 『수도원 기행 2』에 소개된 명소이기도 하다. 수도원에서 하루 일곱 번 진행되는 미사와 기도에 참여했고, 수사들과 함께 노동 체험을 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기도하고 쉬고 일하는 단순한 일과만으로도 힐링이고 구원이었다.

 


100년 역사의 한국 첫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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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분위기의 아침 미사. 수도원에서는 기도와 묵상, 미사가 하루 6~7회 진행된다.


한국 최초 수도원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베네딕도회는 이탈리아 성인 베네딕도(480∼547)를 따르는 유럽 최초의 수도 공동체다. 한국에 진출한 건 1909년이다. 베네딕도회 산하 독일 오딜리아 연합회에서 수도승 2명을 서울로 파견했다. 수도승들은 현재 서울 혜화동 동성중고등학교 자리에 수도원과 학교를 세웠다.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함경남도 덕원, 중국 옌지(延吉)로 수도원을 옮겼다가 동란 중이었던 52년 지금의 자리에 정착했다. 떠돈 세월이 있었지만 100년이 넘는 명맥이 수도원에 이어지고 있다.
 
 예부터 왜관에는 사람과 물류 이동이 많았다. 수도원 앞 왜관역은 1905년 들어섰고, 수도원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전쟁이 끝나면 서울이든 덕원이든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통의 요지에 터를 잡았다. 왜관 수도원이 의외로 속세와 가까운 곳에 자리한 까닭이었다.

측백나무 가지런한 정원, 붉은 벽돌로 지은 오래된 성당. 야트막한 언덕에 들어선 수도원의 첫인상은 정갈한 분위기의 미션스쿨과 비슷했다. 흰 수도복을 입은 오윤교(55) 신부가 반갑게 맞아줬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식당으로 향했다. 백숙과 잡곡밥, 버섯햄볶음을 포함한 반찬 5개가 나왔다. 절밥처럼 간소한 음식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푸짐한 한 상 차림이었다.

사실 왜관 수도원은 음식으로 꽤 유명하다. 수도원에는 3만 평(약 10만㎡) 면적의 논도 딸려 있다. 수도원은 직접 수확한 쌀로 밥을 짓고, 텃밭에서 키운 오이·양파·파 등 채소로 음식을 만든다. 수도원은 소시지도 직접 만든다. 수도원을 설립한 독일 수사들이 만들기 시작한 소시지 맛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처음에는 수도원에서 직접 돼지를 키웠는데 지금은 국산 돼지고기를 사다가 만들고 있다. 그래도 수제 소시지를 수도원에 피정을 와서 먹을 줄은 몰랐다.

피정 참가자가 이용하는 객실 ‘손님의 집’은 단정하고 편안했다. 2평 남짓한 독실에 화장실도 달려 있었고, 싱글 침대와 작은 나무책상, 벽걸이 십자가가 있었다. 에어컨도 있었고, 속도 빠른 무선 인터넷도 잡혔다. 오 신부는 “베네딕도 수도원은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전통이 있다”며 “피정 온 이들이 심신의 기력을 회복하고 돌아가도록 돕는 게 우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오후 1시 본격적으로 수도원 일과에 동참했다. 일과표에 나온 수도원의 하루는 다음과 같았다. 오전 5시 기상해 잠들 때까지 모두 7번의 기도와 묵상, 미사에 참가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노동을 한다. 노동 시간에 피정 체험자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산책을 하든, 객실에서 쉬든, 예배당에서 기도를 하든, 아니면 수사와 함께 노동을 하든 자유다. 미사와 기도 참석도 사실 의무 사항은 아니다. 휴대전화 반납, 무조건 침묵 등 엄격한 규율을 각오했는데 예상보다 수도원의 일과는 느슨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

베네딕도 수도원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지침에 따라 노동을 중시한다. 성 베네딕도가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고 했을 정도다. 수도원은 한국에서 인쇄소와 목공소·철공소도 지었다. 자급자족을 위해서였다. 수도원은 지금도 왜관 지역에서 학교와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웃을 섬기고, 가난한 이를 돌보는’ 전통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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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고 출신의 조 골롬반 수사가 성구를 만드는 모습.

 
오 신부를 따라 수도원 시설을 둘러봤다.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작업장도 구경했다. 먼저 십자가·촛대 등 제구(第具)를 만드는 금속공예실을 방문했다. 아프리카 토고 출신의 조 골롬반(44) 수사가 작은 망치로 성작(聖爵. 포도주를 담는 잔)을 다듬고 있었다. 한국으로 파견 온 그는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금속 공예를 배웠다고 했다. 이어 유리화공방을 찾았다. 백발 성성한 조종운(73) 수사가 유리화, 즉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고 있었다. 조 수사가 만드는 작품이 전국의 성당을 장식하고 있다고 했다. 수도원의 수사 약 70명은 이처럼 각자 맡은 일이 있다.

이어 분도출판사(분도는 베네딕도의 한자 음역)를 찾아갔다. 요즘은 성경과 신앙서적을 주로 출간하지만 70∼8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을 펴낸 유서 깊은 출판사다. 김지하 시집 『밥』, 최민식 사진집 『인간』 등이 분도출판사의 대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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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미가 돋보이는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기도만큼 노동을 중시하는 수도원에 왔으니 땀을 흘려야 할 것 같았다. 오 신부에게 허드렛일이라도 시켜달라고 했다. 3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수사들과 구슬땀을 흘리며 손님의 집 유리창을 닦았다. 쉬는 시간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15년 전 육군 일병 시절의 어느 오후가 떠올랐다.

오후 6시 성당에서 진행되는 저녁 기도에 참석했다. 성당은 초등학생 때 한 번 가본 뒤 처음이어서 모든 게 어색했다. 수사들이 합창하는 성가 ‘안티포날레’를 가만히 경청했다.

“타는 듯 우리 마음 쓰라리오니, 싱싱한 은총으로 낫게 하소서. 궂은 일 눈물 흘려 깨끗이 씻고, 그릇된 욕정일랑 끊어주소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도다” 인생을 송두리째 헌신한 이들의 기도 소리가 속인의 가슴을 흔들었다.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지고 하늘이 열리는 것 같은 환상이 펼쳐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슴 속에서 성가가 내내 맴돌았다.  



거룩한 죽음을 되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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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는 피정 참가자. 미사와 기도 시간 외에는 자유롭게 보낸다.


오후 6시30분. 성독(聖讀), 그러니까 거룩한 책읽기 시간이었다. 손님의 집 책장에서 가져온 『베네딕도 규칙서』를 읽었다. 1500년 이상을 이어온 수도 공동체가 궁금해서였다. 칼날처럼 차가운 율법서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이를테면 늦잠 자는 형제를 훈계하는 법, 손님을 대접하는 법, 의류와 신발을 관리하는 법도 있었다. 물론 내용 대부분은 수도자의 자격, 기도와 미사에 관한 것이었다.

아구찜이 나온 저녁 식사를 마치고 8시 끝기도에 참석했다. 가톨릭에서는 밤을 죽음으로, 아침을 부활로 여긴다. 하여 하루를 마감하는 끝기도는 유독 분위기가 엄중했다. 파이프오르간 연주와 조화를 이룬 그레고리오 성가가 장엄했다. 하느님의 복을 구하는 마지막 기도에서는 마음이 숙연해졌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멘.”

거룩한 죽음. 이 말 앞에서 어떤 인간이 겸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객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거룩한 죽음’이란 말을 되뇌었다.

이튿날 오전 5시 객실 스피커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죽음에서 살아난 새날은 기도로 시작했다. 하나 속세와의 단절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손은 스마트폰을 문지르고 있었다. 한참을 SNS와 회사 인트라넷을 힐끔거렸다. 일상을 벗어나고도 일상을 그리워하는 꼴이 영락없는 죄인이구나 싶었다.

6시30분 아침 미사 때는 영성체(領聖體)가 있었다. ‘내 살을 먹으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며 빵 조각을 먹는 의식이다. 참가자들을 따라 강단 쪽으로 나갔다.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빵 조각을 받아먹었다. 드디어 차례가 왔는데, 수사가 물었다. “세례는 받으셨는지요?” “네. 받았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주변을 둘러보니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서둘러 자리로 돌아왔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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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아침식사. 식빵·계란·과일·우유 등으로 구성된 유럽식이다.


민망한 마음은 아침 식사가 달래줬다. 식빵과 소시지와 과일, 그리고 따뜻한 우유가 나왔다. 유럽식 아침을 먹으며 다른 피정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문제의 답을 찾고자 신부와 상담을 했다는 30대 여성, 부대끼는 도시를 피해 수시로 전국의 수도원을 찾는다는 중년 남성 모두 어제보다 얼굴이 밝아보였다. 조규희(59)·노신영(29) 모녀는 “여름 휴가로 피정을 오길 잘했다”고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오복음 11장 28절).” 2000년 전 예수의 약속이 저들에게 이뤄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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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 300


● 여행정보=서울시청에서 경북 칠곡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osb.or.kr)까지는 약 270㎞, 자동차로 3시간 거리다. 경부선 왜관역에서 수도원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다. 개인 피정 참가자는 손님의 집에서 묵는다. 1인실 1박 4만5000원(세 끼 식사 포함). 다인실(2∼6인실) 1인 4만원. 손님의 집은 객실이 모두 15개로 많지 않은 편이어서 일찌감치 전화로 예약하는 것이 좋다. 수도원 입구 성물방에서 소시지(1만∼2만원)와 각종 성구를 판매한다. 054-97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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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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