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내 혼에 불을 놓아>(이해인 수녀 시집), <밥>(김지하 이야기 모음집), <꽃들에게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분도우화 시리즈), <인간 Ⅳ>(최민식 사진집), <봉인된 시간>(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인간의 죽음>(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교회란 무엇인가>(한스 큉), <상처입은 치유자>(헨리 나웬), <성스러움의 의미>(루돌프 옷토),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박재찬)….
독서가들에게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이 책들은 모두 가톨릭 분도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그 분도출판사가 창립 60돌을 맞았다. 분도란 성베네딕도수도회의 창설자인 베네딕도 성인의 한자식 표기다. 분도출판사는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에서 만들어졌다. 분도출판사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함경남도에 있었던 덕원수도원에서 1910년 처음 펴낸 성분도언행록까지 포함하면 분도출판사의 역사는 1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분도출판사는 성경, 신학, 종교학 등 책을 통해 한국 교회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문제, 환경문제, 철학, 문학, 예술, 심리, 어린이도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대정신을 밝혔다. 특히 1970~80년대 암울한 독재와 인권탄압의 시대에 정의를 일깨우는 책들을 다수 출간했다. 그 중심에 1972년부터 사장으로 ‘분도’를 이끈 독일 출신 임인덕(1935~2013) 신부가 있었다.
1973년 출판사가 발간한 돔 헬더 카마라 대주교의 <정의에 목마른 소리>는 즉시 파문을 낳았다. 카마라 대주교는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불렀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지를 내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는 말로 유명한, 브라질의 해방신학 지도자다. 그 뒤 교회는 ‘분도’의 판매망을 끓으려고 했고, ‘분도’에 의뢰해 출간하던 교회전례집이나 미사 경본 등의 인쇄도 전면 중단시키겠다고 통보하며 압박했다. 교회의 방해로 판로가 막히자 임 신부는 직접 가방에 신간을 가득 채우고 대학가와 서울 종로의 서점들, 본당들을 찾아다니며 손수 영업 활동에 나섰다.
1977년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출간되자 당시 문화공보부는 전량 소각을 종용했으나, 임 신부는 책을 다락방으로 숨기고 또 다른 곳으로 옮겼다. 주문이 오는 대로 소포로 판매하며, 구조적 불의와 빈곤과 억압에 정면으로 맞서며 가난한 사람들 편을 든 서적을 전파했다.
강창헌 분도출판사 편집장은 “임 신부님은 진보적일 뿐 아니라 보편적이고 겸손해 책으로 ‘시대의 징표’를 알렸다”며 “인물이나 저자, 외국 서적을 보는 안목이 탁월해 김윤주, 정한교 같은 최고의 편집자이자 번역자들을 두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분도’의 책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60돌 기념식은 6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베네딕도 피정의 집 성당에서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와 ‘분도’ 정학근 사장 신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다.
이 자리에선 <교부들의 성서주해> 총서 완간 및 한국교부학연구회 창립 20돌 기념식도 함께 진행된다. <교부들의 성서주해>는 신·구약 성경 전권에 대한 교부들의 사상과 신앙을 그 정수만 뽑아 현대어로 옮겨 엮은 29권의 방대한 총서다. 이 총서는 현대 독자들이 고대 그리스도교 시대에 활동한 교부들의 핵심 사상에 스스로 다가가 심취해 볼 수 있도록 했다.
한국교부학연구회(회장 장인산 신부)는 2002년 고 이형우 아빠스, 정양모, 서공석, 함세웅 신부, 고 정한교, 성염 교수 등이 함께하며, 우리나라에 교부학을 처음 소개하고 연구회의 토대를 놓았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