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건축가 알빈 신부 (상)
우리나라 상황 맞는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성당 설계
독일서 연길교구에 선교사로 입국
1946년 공산군에 체포돼 감옥살이도
‘대면식 미사’에 관심가져 설계에도 반영
문경 점촌성당… 토착화 성당으로 평가
발행일2016-09-04 [제3010호, 13면]
다시 1943년 9월부터 용정 상시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던 알빈 신부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20일에는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공산군에 체포돼 남평(南平)과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다 1949년에는 결국 독일로 추방됐다. 그는 감옥에서 수감생활 중의 장면을 연필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연길 교구장 브레허 주교는 벨기에와 독일에서 시작된 전례운동을 지지했는데, 신자들이 전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미사경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특히 1932년에는 ‘신자들을 향한 미사’를 도입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 공식화되고 보편화된 이른바 ‘신자들을 향한 대면식 미사’는 당시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고, 알빈 신부는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1949년 독일로 추방된 알빈 신부는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있는 중학교 미술교사로서 미술과 제도를 강의하면서 벽화제작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교회 건축 설계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의 건축개념이 당시로서는 너무 혁신적이어서, 바로크 양식을 옹호하던 당시 독일 수도원 책임자들에겐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 전 이 12년 동안이 그에게 있어서는 교회건축가로 변신하는 준비 기간이 됐다. 당시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건축 사업을 활발히 펼쳤으며, 전례운동과 근대건축운동의 선두에 섰던 독일에선 전통적인 양식의 교회건축에서 벗어난 새로운 개념의 다양한 교회건축이 루터파 교회와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알빈 신부는 가톨릭전례와 도상학(圖像學, Iconography)을 연구하고 설계에 적용했던 루돌프 슈바르츠(Rudolf Schwarz, 1897~1961)와 그의 작품에 깊이 심취했다.
알빈 신부는 이미 간도에서의 사목시절, 당시로서는 교회에서 공인되지 않았던 대면식 미사를 드리기도 하는 등 전례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에 관한 실천적인 작업으로 교회건축의 배열과 새로운 도상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장차 아프리카 선교를 희망했었는데 담 신부(F. Damm, 卓世塋, 1900~1964)의 요청으로 1958년 김천 평화성당을 설계하게 됐고, 이듬해에는 렌하르트 신부(A. Lenhard, 盧)의 의뢰로 문경 점촌동성당을 설계했는데, 한국적 상황에 맞춘 실용적 설계라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60년에는 지베르츠 신부(E. Siebertz, 지)의 요청으로 가은성당(1961.4~1961.11)을 설계하고, 부산 분도병원 성당도 설계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961년 12월 15일 한국에 재입국해 왜관 수도원에서 본격적으로 건축설계와 미술작업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