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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11)우리 마음을 노래하는 ‘시편’

procurator 0 1,828 02.13 14:57

기쁨·찬미와 슬픔·저주까지… 모든 감정을 담아

노래로 시편 바치는 ‘화답송’
깊은 묵상 후에 노래 불러야
인위적이지 않은 표현 중요


독일 레겐스부르크의 해질녘 풍경.


오늘 처음으로 제가 머무르고 있는 분원과 한 건물로 이어져 있는 성당에서 본당 신부와 함께 주일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이 성당은 2년쯤 전에 있었던 큰 폭풍으로 탑과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날아가 버린 곳입니다. 본당 신부는 이제 서품을 받은 지 갓 1년 된 어린 사제인데, 쿠바 역사에서도 꽤 중요한 성벽 바깥 첫 성당인 이곳을 수리하느라 정부 관계자와 이야기를 해야 하고, 정부 쪽 지원 이외에는 자기가 재정을 충당하느라 고생을 많이 해 꽤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이전에 성당 안쪽 복도였던 곳을 임시로 꾸며, 30여 명의 신자가 미사 전부터 와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활기차게 노래하면서 미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쿠바에 온 지 한 달이 되어가는 다음 주부터 한동안 제가 미사를 거행하고 강론도 해야 합니다. 본당 신부가 긴 휴가를 가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더 열심히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중입니다.

독일에서 햇수로 7년, 그리고 이제는 독일과는 또 완전히 다른 나라에 와서 생활하다 보니, 새삼 말과 언어에 민감해지게 됩니다. 사실 서울 종로구 혜화동 토박이 할머니 밑에서 옛 서울말을 들으면서 20년 가까이 지내다가 이제는 그 이상을 경상북도 왜관에서 지냈으니, 그동안 표현에 조금 민감해져 있던 차입니다. 혹시나 타지에서, 타국에서 오랜 기간 생활을 하신 분들 역시 공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떠나기 전,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셨던 레겐스부르크 한인본당 공동체 분들과 마지막으로 식사할 때였습니다. 한 분이 “예전에는 이 말을 독일어로 어떻게 표현하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그냥 내가 아는 말에 맞추어 생각해요. 그래서 더 단순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그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실제로 타국에서 아주 오랜 시간 정착해서 사시는 분들이거나 언어에 재능이 있으신 분들은 원하시는 대로 말씀하시는 데에 무리가 없으시겠지만, 제 형편으로는 결국 늘 쓰는 단어와 문장만 사용하게 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냥 아는 한도 내에서 말하는 데에 만족하게 되고 늘어가는 건 눈치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음악 덕분인지, 언어와 말이 가진 표현의 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전례를 거행하게 되면 정말 많은 언어 표현을 하게 됩니다.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공동체 모습 자체가 보여주는 상징 언어, 성호경부터 합장, 서 있거나 앉거나 무릎을 꿇는 등의 자세가 보여주는 몸짓과 행동 언어 등이 모두 하느님과 전례를 거행하는 우리 자신에게, 또 이를 바라보는 제삼자에게 모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직접적으로 와 닿는 건 말로 하는 언어입니다. ‘아멘’, ‘알렐루야’ 하는 짧고 간단한 대답과 외침부터 시작해서 독서자의 독서나 사제의 기도문 낭독, 성가를 노래로 바치는 찬송 등이 모두 말로 표현됩니다.

(왼쪽) 이탈리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의 프라 안젤리코 그림 방식 시편집. 기도하는 다윗 모습이 담겼다.
(오른쪽)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리이다’(시편 51편)라는 내용을 담은 책갈피.

그 가운데 저는 마음을 움직이는 시편 낭송을 제일 좋아합니다. 미사 중에 시편을 노래로 바치는 화답송은 보통 미사 전례에서 우리가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응답’(anabasis)이라는 측면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화답송 본문 자체가 이미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에 또 다른 ‘선포’(katabasis)가 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그렇게 선포된 하느님 말씀을 대답으로 바치기에 앞서 내 안에서 내면화하는 ‘묵상’(diabasis)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등 화답송은 그 자체로 아주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시편에는 기쁨과 찬미, 환호의 시편도 있지만, 끝없는 슬픔과 외침, 절규를 표현한 시편도 있고, 때로는 남을 저주하는 시편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날 것 그대로, 혹은 승화시켜서 보여주는 시편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고, 또 그래서 이 시편을 노래로 바칠 때 노래하고 듣는 모든 이들의 마음마저 움직이게 만들지 않나 합니다. 물론 아쉽게도 지금 우리의 전례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시’(詩)로 보여주기에는 아주 조금 아쉽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몇 번 화답송을 만들어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의 시편 번역문이 시나 노랫말로 만들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딱딱하다는 인상을 받아 결국 몇 번 만들다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성가책이 만들어질 때에 음악가들과 시인들, 우리말을 잘 아시는 분들이 모여서 화답송 시편도 함께 다듬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래도 아쉬운 대로 전례 안에서 이 시편이 우리 마음 안에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시편 낭송을 하시는 분들께 몇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전례 안에서 시편 낭송을 하는 분들은 본래 아무나 하는 분들이 아닙니다. ‘프살미스타’(Psalmista), 다시 말해서 ‘시편 낭송자’라는 직책 이름을 따로 가질 정도로 준비된 분들이어야 합니다. 시편 낭송자는 ‘칸토르’(Cantor)라고 해서 전례에서 노래로 이끌어가는 분들 가운데 한 분이 맡을 수도 있는데, 그만큼 시편을 먼저 충분히 알고, 묵상하고, 제대로 표현해서 듣는 분들의 마음에 시편을 심어주었으면 합니다.

가끔은 화답송 시편이 부담스러운 자리이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발성에 신경을 쓰느라 우리말 발음을 제대로 못 하거나, 반대로 너무 꼭꼭 찝어 발음하느라고 띄어 읽기도 없이 ‘주.님.은.나.의.목.자’를 아주 천천히 낭송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저주 시편도 아주 좋아합니다. 몇 년 전, 아주 힘들었던 사순시기에 “Warum ist das Licht gegeben dem Mühseligen”(이 곤궁한 이에게 도대체 왜 빛을 보게 하셨나이까)라는 욥의 외침을 노래로 만든 브람스의 모테트를 부르면서 ‘저주 시편도 이렇게 지금 나의 마음을 깊이 표현할 수 있겠구나’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시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시편을 깊이 받아들이고 그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합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요. 그러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하느님의 말이자 우리의 말이 되는 시편이 다 같은 마음을 만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며칠 전 끝기도를 바치다가 찬미가 한 절이 갑자기 마음에 확 들어왔습니다. 보통은 로마 성무일도 찬미가를 그대로 자국어로 번역하는데, 스페인 주교회의에서는 찬미가를 아예 새로 만들었습니다. 단순한 내용인데도 얼마나 확 와닿던지요. 우리네 성가, 시편, 찬미가가 시인들의 깊고 아름다운 시가 되기를, 또 우리의 마음이 시와 하나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Antes de cerrar los ojos, / los labios y el corazón, / al final de la jornada, / ¡buenas noches!, Padre Dios.”
“두 눈을 감기 전, 입술도 잠그고 마음도 닫기 전에, 이 하루 여정의 끝에 서서 하느님 아버지께 인사 올립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