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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왜관수도원 100주년 역사전시관 (상)

procurator 0 2,061 02.13 15:35

80년 만에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돋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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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100주년 기념역사전시관’ 전경.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100주년 기념역사전시관’(이하 역사전시관)은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한 세기를 기념하기 위해 2009년 9월 20일 개관했다. 2007년 4월 6일 새벽, 누전으로 추정되는 큰 불로 왜관수도원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이후 수도형제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많은 은인들 덕분에 2009년 수도원에 성당과 본관을 세우고 이에 맞춰 역사전시관도 함께 열 수 있었다.

100주년을 준비하기 위해 수집 정리한 선배 수도자들의 소중한 유품과 유물, 진기한 자료들이 화재로 거의 소실됐기 때문에 전시품들은 소박하다. 다행히 화마에도 살아남은 서울 백동수도원, 함남 덕원수도원, 북간도 연길수도원 그리고 왜관수도원의 유물들과 사진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역사전시관 개방 시간은 오전 9시~11시30분, 오후 1시~5시30분까지다.

역사전시관 유물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8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을 꼽을 수 있다. 이 화첩은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를 창출한 최고의 거장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 일반산수화, 고사인물화 등 모두 21점의 다양한 작품들을 담고 있다. 특히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금강산 일만이천 봉을 과감한 필체로 그린 ‘금강내산전도’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2009년 9월 20일부터 10월 11일까지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현재 진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위탁 보관돼 있고 영인본만을 전시하고 있다. 한국 진출 백주년을 기념해 독일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2005년 영구임대 형식으로 왜관수도원에 돌려준 것이다. 화첩이 먼 길을 돌아 우리 품에 돌아온 연유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겸재정선화첩’은 1925년 노르베르트 베버(Norbert Weber, 1870~1956) 총아빠스가 독일로 가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1909년 당시 조선 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 초청으로 2명의 베네딕도회 선교사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파견됐다. 한국에 진출한 첫 남자 수도회다. 이 결정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분이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장상이었던 베버 총아빠스였다. 선교 베네딕도회원들은 서울 혜화동(현 서울 가톨릭대학교 자리)에 땅을 구입해 백동 수도원과 학교(숭공 기술학교, 숭신 사범학교)를 세웠다. 베버 총아빠스는 자신이 파견한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선교 활동을 살펴보기 위하여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수도자이며 예술가였던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문물을 접하고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매료됐다. 첫 번째 여행에서 받은 감명과 견문을 바탕으로 1915년 독일에서 「고요한 아침의 나라」(분도출판사에서 2012년에 같은 제목으로 번역 출판)라는 제목으로 여행기를 출간했다. 두 번째 방문에는 무비카메라를 갖고 들어와 일제의 탄압으로 말살되고 있는 한국의 민속문화를 필름에 담았다. 이를 토대로 1927년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해 한국 문화와 전통을 독일에 알렸다.

1977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지하실 공사 때 우연히 발견한 영화 원본을 토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제목으로 베네딕도 미디어에서 2009년 DVD를 제작했고 방송에서도 여러 차례 방영됐다. 이 영화에는 베버 총아빠스 일행이 금강산을 방문한 장면이 나온다. 금강산의 신비로움에 깊은 감동을 받은 베버 총아빠스는 1927년 독일에서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제목으로 금강산 여행기도 발간했다. 방문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갈 때 베버 총아빠스는 한국의 고미술품들을 구입했는데 그 가운데 ‘겸재정선화첩’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화첩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박물관 진열장 안에 다른 한국민속품과 함께 전시됐다. 반세기 동안 어느 누구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깊은 잠을 자고 있다가 1975년 독일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 유준영(전 이화여대 교수)씨가 이 작품의 소재를 알고 직접 방문해 확인한 후 화첩의 존재를 국내 미술학계에 알렸다.

마침내 ‘겸재정선화첩’은 80년 만인 2005년 10월 29일 오전 11시30분 경 인천공항을 통해 고국 품에 돌아왔다. 귀환 여정에는 우리 수도원 선지훈(라파엘) 수사 신부의 공로가 숨어 있다. 선지훈 신부는 독일 유학 시절 화첩에 관해 들었고 한국 반환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당시 같은 학생 수도자 신분이었던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와 친분을 쌓고 한국 반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이해를 구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 덕분에 드디어 2005년 10월 4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화첩의 한국 반환을 결정하고 왜관수도원과 합의서를 교환했다.

반환이 결정된 이후 대두된 문제는 화첩을 한국에 안전하게 수송하는 방법이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선 신부가 직접 들고 오는 방식을 택했다. 이후 선 신부는 “독일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11시간 동안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화첩을 지켰다. 왜 이토록 고지식하게 행동했는지 지금은 실소가 난다”고 고백했다. 국보급 문화재를 가방에 넣어 직접 들고 왔으니 그 긴장감이야 오죽했겠는가.

2005년 10월 22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열린 화첩 반환식에서 예레미아스 슈뢰더 총아빠스는 사랑과 존경과 신뢰의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선임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님은 한국 문화에 심취했고 진정으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화첩이 독일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높이 평가받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반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국인과 한국 역사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겸재정선화첩’을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문의 054-970-2000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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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겸재정선화첩’에 수록된 ‘금강내산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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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왼쪽에서 두 번째)가 첫 한국 방문 기간 중인 1911년 4월 17일 경기도 안성성당으로 가던 길에 교우촌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는 모습.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사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