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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22)그리움·동경 닿아있는 위로의 음악들

procurator 0 2,095 02.13 15:20

떠나버린 이들에게 무슨 말 건넬 수 있을까… 부디 평안하길 기도할 뿐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바흐의 ‘하느님의 때야말로…’ 등

슬픔과 따뜻한 위로 담긴 곡에서
떠나간 이들 향한 그리움 느끼기도
하느님 위안의 손길, 그들에게 닿길

엘 그레코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톨레도 산토 토메(성 토마스) 성당에 걸려있다.


최근 스페인을 방문하고 다시 쿠바로 돌아오기 하루 전날, 스페인 라바날 공동체의 후안 원장 신부 추천으로 마드리드 근교 산 로렌소 데 엘 에스코리알 왕립 수도원(Real Monasterio de San Lorenzo de El Escorial)을 방문했습니다. 도서관과 왕실 묘소 등이 인상적이었는데, 특히 엘 그레코(El Greco)의 마우리치오 순교화 원본이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날 오후 일정으로는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는 것이었는데, 프라도 미술관이 기대됐던 이유 중 하나는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가 마르가리타 왕녀를 그린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왕립 수도원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시간이 꽤 걸렸고, 프라도 미술관은 언젠가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그린 라스 메니나스가 기대되었던 이유는, 바로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 피아노 선생님은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과 스페인 음악, 리게티와 쿠르탁 연주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분이었습니다. 이분 덕분에 고음악에서 바로크까지의 음악만 편식하던 제가 인상주의와 현대 음악까지 시야를 넓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졸업시험을 앞두고 선생님 제자들이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음악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저는 파리(Paris)의 이상이자 원형이 되는 브르타뉴의 전설적인 옛 도시 이스(Ys *브르타뉴 말로 파리는 ‘이스와 닮았다’(par-ys)는 뜻입니다)의 이야기를 담은 드뷔시(Debussy)의 ‘물에 잠긴 대성당’(La Cathédrale engloutie)을 연주했는데, 이날 다른 친구가 연주하는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를 너무나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연주도 좋았지만, 라벨이 사용한 화성을 비롯해 곡의 양식, 아니 그냥 곡 자체가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마침 졸업시험을 준비한다고 한참 힘들었던 때였던 것도 있지만, 그냥 막 슬픈 게 아니라 무언가 아련한 슬픔이면서도 따뜻한 위로가 함께 느껴진 이 곡을 듣고 있다가 그만 눈물을 쏟을 뻔했습니다.

이 곡은 작곡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라벨 자신은 그저 어떤 어린 왕녀가 스페인 궁정에서 추었을 법한 춤, 파반느(Pavane)를 작곡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자리에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나오는 어린 왕녀를 상상하면서 곡을 썼다고도 합니다. 어머니가 스페인,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바스크인이었던 라벨은 어려서부터 스페인 음악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라벨을 동시대의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로 한데 묶기는 하지만, 정확하게는 음악적인 색채와 화음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인상주의와 다른 부분도 많습니다.

아무튼 아련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라벨의 이 곡은 지금도 늘 제 마음을 꽤 움직이게 하는 곡이라, 한국을 떠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끔 피아노에 앉아 이 곡을 쳐보고 스스로 위안 받고는 했습니다. 라벨이 아주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만큼, 라벨 자신이 연주한 음원이 남아있습니다. 아무래도 복원한 음원이라, 현대의 여타 다른 연주자가 연주한 음원에 비해 음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은 그다지 반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라벨이 어떤 춤을 그리면서 그리고 어떤 죽음을 떠올리면서 이 곡을 작곡하고 연주했을까’하고 꿈꾸게 해주는 고마운 음원입니다.
 

루이 비에른이 연주하고 사망할 때 앉았던 오르간 의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오르간 발코니 한 쪽에 기념으로 보관돼 있다.


아련한 그리움을 떠올리는 데에는 떠나간 이들에 대한 그리움도 맞닿아 있습니다. 지난 원고에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게레온 수사님의 죽음에 대해 말씀드리긴 했지만, 전설적인 죽음을 맞이한 분들도 계십니다.

전례학자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이끌어내는 데 한몫을 한 성 베네딕도회 마리아 라악 수도원의 오도 카젤(Odo Casel) 신부님은 1941년 성탄절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자기는 부활절에 죽기를 소망한다고 하셨고, 1948년 부활 성야 때 ‘그리스도 우리의 빛’(Lumen Christi)을 부르신 다음 독서대에서 파스카 찬송(Exsultet)을 부르기 위해 책을 펼치고는 그대로 쓰러져, 소망대로 부활절 이른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음악가 가운데에는 루이 비에른(Louis Vierne)이 떠오릅니다. 비에른은 1937년 6월 2일 제자인 모리스 뒤뤼플레(Maurice Duruflé) 와 함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오르간 연주회를 열었고, 뒤뤼플레가 곁에서 오르간 음색 배치를 도와주는 가운데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미 마지막 곡을 시작했을 때부터 창백해졌다고 하는데, 그런 가운데에도 트립티크(Triptyque) 3부작 마지막 곡인 ‘죽은 아이를 위한 비석’(Stèle pour un enfant défunt)을 연주하고 마지막 화음까지 완성하고는 그대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그레고리오 성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즉흥연주가 계획되어 있었지만, 쓰러지면서 오르간 페달의 낮은 ‘미’음만을 길게 눌렀다고 합니다. 살베 레지나는 잠자리에 들어가기 전, 하루를 마치면서 바치는 끝기도의 마지막 노래입니다. 물론 이 끝기도는 하루의 마지막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마지막도 미리 기념합니다. 비에른은 마지막에 어떤 마음으로 죽음을 연주하고, 자신을 하느님 품에 맡겼을까요. 그레고리오 성가나 고음악 반주를 할 때는 보통 첫 시작이나 마침은 3음이 없는 근음과 5음으로 화음을 만듭니다. 물론 우연히 눌러진 음이기는 하지만, 다장조로 시작하는 살베 레지나에서의 3음, ‘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건너감’을 뜻하는 걸까요.

‘비극’ 혹은 ‘악투스 트라기쿠스’(Actus tragicus)라고도 하는 바흐의 장례 칸타타 ‘하느님의 때야말로 가장 좋은 때’(Gottes Zeit ist die allerbeste Zeit)가 있습니다. 이 작품의 첫 곡 소나티나(Sonatina)를 한 대의 피아노에서 두 명의 연주자가 연주할 수 있게 편곡한 작곡가가 있습니다. 현대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로도 유명한 헝가리의 죄르지 쿠르탁(György Kurtag)인데, 쿠르탁과 몇 년 전에 돌아가신 그의 부인, 마르타 쿠르탁이 2015년 11월에 함께 연주한 영상을 보고 있으면 등이 굽은 이 노부부의 연주에 감동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영상미를 뽐내는 연주 동영상들도 많지만 투박한 업라이트 피아노의 소리와 함께하는 노부부의 연주가 많은 위안을 줍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있어서는 안 될 참사가 모든 성인 대축일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앞두고 벌어졌습니다. 한참 반짝반짝 빛나야 할 젊은 친구들의 죽음을 전하는 소식 앞에서 어떤 말도 덧붙이기가 힘들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아름다운 추억을 안고 갔으면 하지만, 그 추억마저도 우리가 박탈해 버린 것 같아 너무나 미안합니다. 부디 하느님께서 젊은 영혼들을,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위안의 손길을 펼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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