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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문화 순례] 왜관수도원 100주년 역사전시관 (하)

procurator 0 1,640 02.13 15:38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100주년기념전시관에는 오래된 성작이 한 점 있다. 성작 다리 부분에 HIC EST CALIX SANGUINIS MEI(이는 내 피의 잔이다)라는 성찬제정축성문 라틴어가 음각으로 새겨 있다. 평양교화소에서 1950년 2월 7일 순교한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 신상원 보니파시오(Bonifatius Sauer, 1877~1950) 주교 아빠스의 성작이다. 이 낡은 성작은 북녘 땅에서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수도자들의 희생을 웅변하고 있다.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에 자신들의 피를 봉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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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가 사용하던 성작. 1949년 덕원수도원에서 1952년 극적으로 왜관수도원까지 옮겨졌다.


1949년 5월 11일 덕원 수도원에서 추방될 당시 차부제였던 김영근 베다(1918~2002) 신부가 이 성작과 수도원 인장,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의 편지봉투 열람용 칼을 몰래 감춰 가지고 나왔다. 성작은 덕원에서 평양으로 이후 서울, 부산, 대구를 거쳐 1952년 왜관에 이르기까지 김 베다 신부의 피난 여정에 동행했다. 김 베다 신부는 살아남은 한국인 수도자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소련군이 원산에 진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종교탄압정책을 시작했다. 특히 함경도 지역 천주교 총 본산인 덕원 수도원은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1946년 3월 수도원 토지 몰수를 시작으로, 1948년 12월 1일 수도원 당가 엄 다고베르토(Dagobertus Enk, 1907~1950) 신부가 포도주 불법 제조 및 탈세 혐의로, 1949년 4월 28일에는 인쇄소 책임자 배 루도비코(Ludovicus Fischer, 1902~1950) 수사가 반(反)공산주의 불온 문서 인쇄 혐의로 체포됐다. 마침내 1949년 5월 9일 밤부터 5월 11일 밤까지 모든 유럽인 수도자들과 한국인 성직수사들이 체포되고 한국인 수사들이 추방됨으로써 덕원 수도원이 폐쇄됐다. 체포된 이들은 평양교화소와 강제수용소들을 거치면서 옥사, 피살, 병사 등으로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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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관수도원이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


1909년 한국에 파견된 첫 베네딕도회 선교사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1913년 아빠스로, 1921년 원산대목구(후에 함흥대목구) 주교로 서품됐다. 말년에 천식 등 지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매우 쇠약한 몸으로 제일 먼저 체포되어 평양교화소에 수감됐다. 이 작은 노인의 감방은 온갖 악취를 풍기는 구덩이 같았다. 작은 탁자와 변기뿐인 이곳에서 체포될 당시 입었던 속옷 위에 푸른 죄수복만으로 추운 겨울을 견뎌야만 했다. 씻을 물도 제공되지 않았고 다른 수감자들보다 적은 쌀로 버텨야 했다. 결국, 3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1950년 2월 7일 오전 6시 주님 품에 영원히 잠들었다.

성작 옆에는 작은 성합이 있다. 옥사덕수용소의 유물이다. 중범죄자로 평양교화소에 남은 13명의 독일인과 한국인 사제와 수사들을 제외한 59명의 독일인 남녀 수도자들은 1949년 6월부터 1954년 1월 8일 독일로 송환될 때까지 자강도 북쪽 산골짜기에 있는 ‘옥사덕’에서 수용소 생활을 했다. 잔악한 수용소 소장의 감시 아래 중노동과 질병으로 13명이 순교했다. 1950년 9월, 유엔군이 밀고 올라오자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자강도 만포로 ‘죽음의 행진’을 하면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수난 중에서도 이들은 매일 미사를 거행하며 영적 힘을 얻었다. 감시병 몰래 밀밭을 가꾸어 제병을 만들고 산머루로 즙을 내 포도주 대용으로 사용했다. 이러한 십자가의 여정을 ‘성합’이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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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사덕수용소’에서 신앙을 지킨 수도자들 신심을 대변하는 성합.


순교자의 유물 가운데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발행한 상본을 볼 수 있다. 홍태화 루치오(Lucius Roth, 1890~1950) 원장신부의 선종 상본이다. 여기에는 1956년에 순교했다고 잘못 적혀있다. 당시 독일 수도원에서는 홍 루치오 원장신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덕원수도원 원장이자 함흥대목구 총대리인 홍 루치오 원장신부는 1949년 5월 9일 밤 신 주교 아빠스와 함께 체포돼 평양교화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다 1950년 10월 3일에서 5일 사이 인민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 피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홍 신부는 「미사경본」을 비롯한 많은 전례서와 영적서적을 펴냈다.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했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인자해서 ‘살아있는 성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신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가 감옥에서 선종하자 홍 루치오 원장신부가 덕원 수도원의 유일한 장상으로 책임을 다했다. 덕원에서 쫓겨난 후 평양에 숨어들어온 한국인 수사들과 비밀 쪽지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다. 감옥 내부 사정을 알려주고 아픈 형제들을 위해 간단한 의약품과 생필품 등을 부탁했다. 현재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문서고에 이 쪽지들이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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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덕원수도원 원장 홍태화 루치오 신부의 상본.


북녘의 순교자들은 피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수도형제들이나 신자들과 운명을 함께하려다 목숨을 바쳤다. 순교자들은 한민족과 동고동락하며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했고 박해 중에도 하느님만 찾으며 서로 섬기고 사랑했다. 종교와 이념의 경계선에서 외적인 신앙의 고백으로 발생한 순교라기보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한 결과였다. 신앙을 위한 순교만이 아니라 형제를 위한 ‘사랑의 순교’였다. 왜관수도원은 2007년 5월 10일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1949년에서 1952년 사이에 북녘 땅에서 신앙 때문에 순교한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의 시복시성 운동을 시작했다. 시복시성 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다.

※문의 054-970-2000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인영균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장)
사진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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