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15) 구상 요한 세례자 (상)
가을 냄새가 나는 시인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구상(요한 세례자, 具常, 1919~2004)의 시 ‘오늘’이다. 나는 예전에 경북 왜관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서 렉시오디비나(聖讀) 피정에 참가했었다. 가장 무더운 8월 초였다. 피정을 마치고 낙동강 변에 있는 구상문학관을 찾았다. 구도자적 삶을 산 시인이라 그의 예술세계가 궁금했다. 왜관은 구상이 6·25전쟁부터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산 곳이다. 문학관에 들어서자 맨 먼저 반긴 것은 조각상이었다. ‘시인의 명상’이란 청동상인데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그 옆에는 중광 스님이 재밌게 그린 구상의 얼굴 그림이 있었다. 다음으로 반갑게 만난 것은 구상이 종이에 직접 쓴 ‘꽃자리’라는 시였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이 시는 내가 힘들 때마다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전시실에는 구상이 늘 쓰고 다녔던 중절모자, 안경, 돋보기, 만년필 그리고 묵주가 놓여 있었다. 문학관 뒤쪽으로 갔더니 낙동강을 배경으로 아담한 한옥 한 채가 있었다. ‘관수제(觀水齊)’였다. ‘물을 관조하는 곳’이다.
구상과 강의 인연은 깊다. 그의 고향인 함경남도 원산 근교의 덕원은 적전강이 흐르는 곳이다. 젊은 시절, 그 강에서 생각을 키웠다. 6·25전쟁 후에는 낙동강이 흐르는 왜관에 정착해 그 강을 바라보며 스무 해 넘게 살았다. 그리고 서울로 이사해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강이 흐르는 여의도에 살았다. 이렇듯 강은 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강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썼다. 대표적인 시가 ‘그리스도 폴’이다. 구상은 그리스도 폴 성인의 삶을 닮고 싶었다. ‘강’이라는 일터와 ‘남을 업는다’는 것이 좋아 그리스도 폴을 주보 성인으로 삼았다.
신학교 입학과 자퇴
구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흰 턱수염과 잿빛 두루마기, 중절모와 지팡이이다. 그래서 어떤 수필가는 구상에게 ‘가을 냄새’가 난다고 했다. 구상의 본명은 구상준(具常浚)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상아, 상아’ 부르다 보니 외자 이름이 되었다. 구상의 형제는 여럿 있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많이 죽고 큰형은 일본 유학 중에 관동대지진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래서 남은 형제는 둘째 형 구대준과 구상뿐이었다. 부친은 백동성당(현 혜화동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구대준은 수도원 부설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수도회가 원산교구를 관장하면서 신학교도 덕원으로 이전해 가게 되었다. 덕원에 수도원이 완공되었고, 신학교도 건립되었다. 구상 가족 모두는 덕원으로 이사했다. 그때부터 덕원은 구상의 두번째 고향이 되었다. 구상은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부모는 두 아들 모두 신학생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데 구상은 신학교에 3년 다니다가 자퇴했다. 가족들의 실망은 매우 컸다. 사제가 되기 위해선 최소 13년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자유분방했던 구상은 그러한 신학 교육이 답답했다. 서울로 가서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또 자퇴하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서 노동일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일본대학 종교과와 명치대학 문예과에 응시했다. 두 곳 모두 합격했다. 선택한 곳은 일본대학 종교과였다. 문학보다는 철학에 관심이 컸다. 교육과정은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많았다. 교수진도 승려였다. 후에 구상이 쓴 글에 불교 용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유학 당시에 배운 불교 사상 때문이다. 구상은 가톨릭과 불교를 연결하려고 애썼다. 예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선사가 입적했을 때, 노기남 대주교가 조문하고 수녀들이 연도를 올렸다. 구상은 이 모습에 감동해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산비탈 무밭에 핀 들국화모양/ 스님들과 그 독경 틈에 끼여/ 한 무리의 가톨릭 수녀들이/ 효봉 스님 영전에 꿇어서/연도의 합송을 하고 있다… 이 어쩐 축복된 광경인가?/ 이 어쩐 눈부신 신이(神異)런가?/ 서로가 이단과 외도로 배척하여/ 서로가 미신과 사도라고 반목하며/ 서로가 사갈(蛇蝎)처럼 여기는 두 신앙/ 이제사 열었구나, 유무상통(有無相通)의 문을!”(‘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70’에서)
귀국 후, 구상은 함흥에 있는 총독부 기관지 ‘북선매일신문’에 기자로 취직했다. 일제가 인정하는 기관에서 일해야 학병이나 강제징용에 끌려가지 않았다. 이때 흥남질소비료공장 간부 사택에서 살인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이 잡혀 구상은 기사를 쓰게 되었다. 범인의 모습과 태도를 온갖 수식어를 사용해 흉측하게 써서 데스크로 넘겼다. 그런데 기사를 훑어본 사회부장이 “기자는 말이야,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는 경찰의 편이지만 잡히고 나면 범인의 편인거야.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해선 안돼!”라고 했다. 구상은 그 말이 성서의 ‘간음한 여인’ 대목보다도 더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다. 구상은 기자 생활을 “식민지 어용신문의 기자가 되어 용왕 앞의 토끼처럼 쓸개는 떼어놓고 날마다 성전송(聖戰頌)과 공출 독려문을 써댔다”고 자책했다.
기자 생활 중에 약혼했다. 상대 여인은 형 구대준 신부가 사목하는 흥남성당 부설 대건의원 의사 서영옥이었다. 그때 폐결핵이 발병했다. 폐결핵은 당시 치료제가 없어 죽는 병이었다. 구상은 마식령 너머에 있는 마전리의 수도원 산장으로 들어가 열 달 동안 요양했다. 그때 쓴 시가 ‘소야곡’이다. “묘석인 듯 싸느랗게 질린 종이 위에 이 밤도 달빛을 갈아 나의 비명을 새기노라…” 얼마나 절망적인지 첫 문장에서 싸늘한 죽음을 느낄 수 있다. 건강이 회복되자 구상과 서영옥은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그레고리오 성가가 울려 퍼지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중섭과 구상
해방이 되자 남으로 내려왔다. 이유는 「응향(凝香)」이란 시집 때문이었다. 북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원산문학가동맹’은 해방을 기념하는 시집을 발간했다. 구상은 그 시집에 시 세 편을 썼다. 「응향」에 실린 시들은 이념시가 아니라 순수시였다. 평양에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인민을 위한 문학이 아니라 퇴폐적인 시라고 비판했다. 현장 검열과 함께 자아비판이 이어졌다. 구상은 위조 증명서를 만들어 한겨울에 38선을 넘었다. 그러다가 경비병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추위와 허기에 시달렸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재래식 변소 밑으로 내려가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리고는 간신히 서울에 도착했다. 빈손으로 내려왔기에 밀가루 수제비로 끼니를 때웠고 시멘트 포대를 덮고 잤다. 남한에서 구상은 공산주의를 반대한 ‘반공 시인’으로 불렸다.
결핵이 재발했다. 병과 함께 가난도 엄습했다. 아내가 제안했다. 마산요양원에 자신은 의사로 가고 구상은 환자로 입원하자는 것이었다. 아내 말대로 마산요양원으로 내려갔다.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그때 도움을 준 사람이 시인 설창수였다. 그는 구상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해당화 피는 원산에서 공산당들에게 시를 쓴 죄로 결정서와 박해를 받고 월남 탈출하여 사고무친한 자유 남한에서 해당화 같은 피를 쏟으며 고독하게 쓰러진 시인 구상을 구출하자”라는 글을 돌렸다. 구상은 그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일을 계기로 설창수와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사람으로 공초 오상순을 들 수 있다. 오상순은 일본 도시샤대학 종교철학과를 나온 시인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늘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 네가 앉은 자리가 바로 꽃자리다”라는 희망적인 말을 건넸다. 그래서 구상의 그 유명한 ‘꽃자리’란 시가 탄생했다. 구상은 오상순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또한, 구상의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이중섭을 들 수 있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났다. 구상은 이중섭을 처음 만났을 때, 프랑스 화가 루오의 그림에 등장하는 예수의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중섭 역시 구상이 루오의 예수 얼굴을 닮았다고 느꼈다. 두 사람의 생각이 같았다. 이중섭이 귀국 후 원산에 정착했을 때 아이가 죽었다. 구상은 이중섭과 함께 아이의 관을 들었고 아이를 땅에 묻었다. 구상은 가족과 떨어져 비참하게 사는 이중섭을 보살피기 위해 왜관 집 옆에 방을 얻어주었다. 이중섭은 그 고마움으로 ‘구상네 가족’이란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구상에게 결핵이 또 재발했다. 구상은 ‘검은 장밋빛 피를 몇 양푼이나 토하고 시신처럼’ 누워 지내야만 했다. 이중섭이 그림 한 점을 가져왔다. 큰 복숭아 속에 어린이가 청개구리와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중섭은 구상에게 그림을 주면서 “복숭아, 천도복숭아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