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받은 '독서당계회도'를 비롯해 조선 시대 왕들의 글씨(어필)을 모아 만든 책 『열성어필(列聖御筆)』, 한국에서 일했던 영국인 선교사가 1914년 수집한 술병인 백자동채통형병이 한 자리에서 공개된다. 7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환수문화재 특별전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에서다.
이번 전시는 2012년 7월 설립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1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부터 기획됐다. 김계식 사무총장은 "지금까지 기증 680점, 매입 103점, 영구대여 1점 등 총 784점의 국외문화재를 환수했다"며 "실태파악, 보존, 복원, 현지활용 등 여러 일을 하며 10년간 직원들의 비행거리가 629만 km, 지구를 160바퀴 돈 거리"라고 소개했다.
『열성어필』은 조선 문종부터 왕들의 글씨를 목판·석판으로 찍어 공신들과 종친에게 나눠주던 왕가의 책이다. 한 번에 약 300부 정도를 찍어냈던 것으로 추정한다. 1662년 현종이 처음 펴낸 뒤 왕이 바뀔 때마다 종친부에서 선별한 선왕의 글씨를 담아 모두 세 차례 새로운 판본을 찍었다. 이번에 환수된 책은 영조가 1725년 펴낸 판본으로, 존재하는 『열성어필』 가운데 가장 나중 것이다. 태조의 어압(御押, 왕의 서명)이 찍힌 문서인 '숙신옹주 가대사급성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과, 후대에 이 문서를 진상받은 숙종이 태조 어필을 발견한 감흥을 적은 글이 책 안에 들어 있다.
'숙신옹주 가대사급성문'은 태조가 후궁의 딸인 숙신옹주에게 가옥 20여채를 하사하며 내린 글로, 글씨는 다른 사람이 쓰고 마지막에 서명(어압)과 도장(어보)만 태조의 것이지만, 쪽수 표기를 고치면서까지 굳이 앞쪽에 추가했다. 이완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교수는 "임진왜란 이후 많은 자료가 사라져서, 1661년부터 왕가 사람들이 왕의 글씨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라며 "태조의 서명은 엄밀하게는 '태조의 글씨'로 볼 수 없지만 서명만으로도 열성어필의 격을 높이는 것이고, 숙종이 그 글에 대해 쓴 어필을 굳이 추가한 건 영조의 효심"이라고 설명했다.
검약을 중시했던 영조는 책 전부를 새로 찍어내지 않고, 전대에 나눠줬던 열성어필을 다시 거둬들인 뒤 추가할 내용만 덧붙여 책을 새로 묶기만 했다. 이번 환수본의 앞 표지 내지에는 1722년 출간 당시의 기록이, 뒷 표지 내지에는 1725년 재출간 당시의 기록이 적혀있다. 이완우 교수는 "'1723년 나눠준 것을 다시 거두어서 뒤에 첨보해 만들어 돌려준다'는 기록을 남긴 드문 예"라며 "임진왜란 이후 나라에 사치, 향락이 늘어나니 스스로 밥상에 '고기와 물고기 반찬을 두 개 이상 올리지 말라'고 할 정도로 절약정신이 투철했던 영조를 잘 드러내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국외 반출이 엄격히 금지되던 왕의 글씨가 해외를 떠돌다 경매를 통해 국내에 돌아온 이번 유물에 대해 이 교수는 "열성화필 자체는 많이 찍어서 나눠줬기 때문에 드문 유산은 아닌데, 기존의 책을 거둬서 다시 표구해서 준 사례는 드문데다 보존 상태도 좋아 의미가 큰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3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낙찰받은 또 다른 유물 '백자동채통형병'은 조선 후기 백자로 만든 원통형 병에 구리 안료를 칠해 술병으로 쓰던 도자기다. 영국인 선교사 스탠리 스미스가 1914년 수집한 것이라는 표식을 밑바닥에 남겨둔 점이 특징이다. 고려대학교 문화유산융합학부 김윤정 교수는 "백자 일색이던 조선이 후기에는 다른 색도 많이 시도했다"며 "산화철, 산화코발트, 산화동(구리) 3가지가 많이 쓰였는데 그 중에서 산화동은 색을 잘 내기가 까다로운 안료라 남아있는 유물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스탠리 스미스는 영국에 한국 도자기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로, '스탠리 스미스 컬렉션'을 주제로 소더비 경매가 열린 적이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 한국 도자기를 보는 시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며 "굉장히 아름답거나 고급 그릇은 아니지만, 당시 도자기 제작 현실과 선교사에 의해 해외로 옮겨지는 과정 등을 증명하는, 도자사적으로 의미가 큰 유물"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에는 2018년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자발적으로 기증해온 조선시대 면피갑(면과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일반에 최초로 공개된다. 면과 가죽으로 만든 갑옷은 조선시대 보병들이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보병의 수에 비해 남아있는 갑옷이 많지 않아 희귀한 유물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임경희 연구관은 "일반 병사의 것이라 잘 보존해둔 게 적고, 독일 수도원에서 신경써 보존한 덕에 상태도 좋은 편"이라며 "천에 문양까지 찍었던 걸로 봐서는 단순 보병의 갑옷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은 겸재 정선의 화첩을 영구대여 형식으로 기증한 곳이기도 하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강임산 자원활용부장은 "겸재정선 화첩은 경매에 내놓으면 수십억 가치일텐데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이 2005년 왜관 수도원에 영구대여하는 방식으로 기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특별전에는 1913년 일본으로 불법 반출됐다가 2006년 환수해 고궁박물관이 소장 중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과, 어린 덕혜옹주가 일본에 살던 시절 입었던 초록 당의와 붉은치마(2015년 일본에서 환수)도 함께 전시된다. 한국전쟁 때 사라진 국새와 어보(왕의 도장) 중 2014년 미국과 공조 수사로 찾아내고 그 해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 가지고 나와 돌려줬던 '국새 유서지보' 등 도장 9점도 나온다. 전시는 9월 25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