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랄하고 통통 튀는 성모님?… ‘환희의 신비’ 들으며 그려보길
2018년 말, 아예 성탄까지 보내고 새해에 한국으로 들어가라는 권유를 마다하고 어서 공동체 형제들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11월 30일에 귀국해 최대한 서둘러서 버스와 기차 등을 쉬지 않고 갈아타고 왜관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저녁 무렵이라 곳곳에서 학생들이 기차에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습니다. 한참 겨울에 유행이던 롱패딩을 입은 친구들, 소위 ‘김밥’들이 기차와 왜관역에 그득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획일적인 패션, 또 가격이 만만치 않을 그 패션을 위해 부모님들이 그래도 기꺼이 감내하시는 짐을 떠올리면서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전혀 획일적이지 않고 자기 개성대로 조잘조잘 떠드는 친구들 얼굴이 참 맑고 밝아 보였습니다.
저희 왜관수도원이 참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수도원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꽤 많은 간접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순심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목 겸 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는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 유쾌함과 활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친구들 이야기에 미소 지을 때가 많습니다. 비슷한 외적인 이상을 따라가는 유행에 민감한 때일지 몰라도, 한편으로는 각자 가진 개성들이 너무나 반짝반짝 빛을 냅니다.
곧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공경이 지극한 천주교 신자이든 아니든 성모님에 대한 아름다운 노래들은 모두가 좋아합니다. 정말 많은 작곡가가 성모님과 관련한 음악을 작곡했는데, 심지어 그레고리오 성가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노래들은 성모님과 관련한 노래들입니다. 성모님에게서 아름다운 여인상, 어머니상을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어서 그럴까요, 이 음악들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편안함, 포근함,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성모님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 이미지밖에 없는 걸까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하인리히 비버(Heinrich Biber)라는 작곡가가 있습니다. 하인리히 비버는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시도해보곤 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스테레오 연주 공간을 본떠 더욱 발전시킨, 잘츠부르크 성 베네딕도회 성 베드로 수도원 대성당 연주 공간에 맞춰 콘체르트 양식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작곡한 53성부 잘츠부르크 미사곡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하인리히 비버는 바로크 시기 바이올린 연주자로도 아주 유명했는데, 연주자로서의 이점을 활용해 ‘스코르다투라’(Scordatura)라는 독특한 방법을 작곡에도 사용했고, 후기 바로크시기에 유행하던 숫자 기법을 결합해 신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 방식을 최대한 활용한 게 바로 ‘묵주기도 소나타’(Rosenkranzsonaten)인데, 우리가 묵주기도를 바칠 때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라고 일컫는 것처럼 세 개의 신비를 다루었다고 해서 ‘신비 소나타’(Mysteriensonaten)라는 표현으로도 많이 사용합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바치는 네 번째 신비, 빛의 신비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2년에 와서야 추가한 신비라서 당연하게도 하인리히 비버의 음악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에 들을만한 곡을 소개하자면, 저는 개인적으로 하인리히 비버의 신비 소나타를 추천하고 싶은데요, 그 가운데에서도 환희의 신비 부분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시 앞에서 말씀드린 성모님에 관한 이미지를 생각해 본다면, 하인리히 비버는 환희의 신비 소나타에서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성모님, 아니 마리아 상을 보여줍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복음 말씀 내용을 다루고 있는 환희의 신비 제2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듣고 있으면, 통통 튀고 발랄한 소녀 마리아의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앞에 오는 환희의 신비 제1단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심’을 들어보면, ‘프렐류드’(Praeludium)에서 대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대화를 들려준 이후에 ‘아리아와 변주’(Aria mit Variationen)에서 바이올린이 계속해서 ‘위-아래-조금 위-더 아래’의 음들을 들려줍니다. 이 네 음 가운데 첫 음과 끝 음을 선으로 긋고, 가운데 두 음을 가로 짓는 선으로 그어보면 십자가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에 동참하는 한 인간 마리아, 또 우리 자신이 모두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나른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환희의 신비 제1단의 마지막 ‘피날레’(Finale)는 “예”하고 받아들이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진중하고 심각한 분위기가 바로 환희의 신비 제2단에서 바뀝니다. 앞서 말씀드린 ‘스코르다투라’라는 기법은 바이올린 네 개의 현이 원래 ‘솔-레-라-미’로 조율되어 있는데, 이 조율들을 그때마다 바꾸어 연주하는 방법입니다. 이 환희의 신비 제2단은 네 개의 현을 ‘라-미-라-미’로 조율을 바꿉니다. 그러면 바이올린은 이 조율의 변화 하나만으로도 벌써 밝고, 명랑하고, 통통 튀는 느낌을 전해주게 됩니다.
첫 번째 악장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려고 길을 떠난 모습을 보여줍니다. 갈릴래아라는 동네에서 산으로, 유다라는 도시로 가면서 호기심 가득하게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곧 날아가듯이 깡총깡총 뛰어가기도 합니다. 엘리사벳의 집이 눈에 보이자 서둘러 뛰어 들어갑니다. 꼭 발랄한 소녀가 신나게 친척 집에 놀러 가는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이어지는 ‘알르망드’(Allamanda)가 바로 엘리사벳을 만난 마리아의 기쁨, 그리고 엘리사벳이 기쁨에 가득 차서 외치는 인사를 표현한다면, 짧은 ‘프레스토’(Presto)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을 표현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정녕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도다.”
성모 승천 대축일은 한없이 맑고 밝지만, 또 한없이 약할 수도 있는 소녀가 위대한 어머니가 되어 승천을 한 사건, 또 낮을 대로 낮아진 이들이 하느님의 굽어보심으로 드높여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날은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을 함께 겪고 있는 우리 모두가 여성, 아이들, 힘없는 이, 가난한 이들에 대해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점도 가르쳐 줍니다.
이날 듣는 하인리히 비버의 음악은 신비 전체를 통틀어 여성, 소녀, 아이로 대표되는 약자들이 드높여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게다가 이날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부터 시작해, 현재 물신만능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는 우리와 우리 주위의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기억하는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이 음악을 들으며, 우리 주위의 약자들이 얼굴 없는 이들이 아니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들처럼 빛나는 얼굴을 지니기를 함께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