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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20)덜어내고 비워내기–하나의 소리

procurator 0 1,942 02.13 15:19

하나의 소리 안에서 모두와 하나 되고 하느님 만날 수 있기를


삶·전례·음악에서 비움 필요
음 하나가 합창 이끌 수 있고
고요 속에 평화로움 느끼기도


고요한 쿠바 산호세 수도원 전경.


모처럼 고요한 수도원으로 돌아와 잠을 청합니다. 빛도 없고,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 이곳 쿠바 산호세 수도원은 정말 고요합니다.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사나흘, 많게는 닷새 동안 전기도, 물도 없이 지내면서도 늘 시끄러워서 잠을 청하기 어려웠던 아바나와는 아주 다릅니다. 가을 풀벌레 소리와 우리 집을 지켜주는 개가 짖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쿠바인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소음 수준의 리듬 타는 소리도 여기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여러 다른 소리를 덜어내고 보니 오히려 함께 기도하는 소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 너무나 좋습니다.

저는 본래 욕심이 정말 많았습니다. 아마 여전히 제 내면은 그대로겠지만, 무언가를 덜어내기보다는 무언가로 자신을 더 채우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특히 지식욕과 지식욕을 겉으로 드러내어 주는 책 수집 욕심이 참 많았습니다. 침방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한밤중에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수도원 도서관이 있지만, 신학교를 다니면서 매달 받은 용돈으로 꾸역꾸역 책을 사 모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침방에 책이 꽤 들어차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리 미련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욕심이 바뀐 건 2007년에 있었던 수도원 화재의 역할이 큽니다. 불이 건물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는데, 그때 개인이 무언가를 가지려고 발버둥 쳐봤자 다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 깊숙한 곳까지 와서 딱 박힌 것 같습니다.

물론 음악을 공부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 사본 팩시밀리와 음악 전문 서적들, 악보들을 사 모은 것을 생각해 보니 욕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한다기보다는 수도원 음악 도서관을 만들고 함께 이 지식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조금은 더 나은 방향으로 향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도 이 욕심마저 이번에 쿠바로 선교를 나오면서는 거의 다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끝까지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엘마르 신부님의 유품인 수도원 잔해에서 발견해 보관하고 있던 소리굽쇠, 불에 타고 그을려 검게 변하고 심지어 당시 온도 때문에 크기마저도 많이 늘어나버린 이 소리굽쇠를 마지막으로 유물 담당 수사님께 넘겨드리고 왔습니다.

최근 채움과 비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요함을 태생적으로 두려워한다는 쿠바인들 사이에 있으려니 너무나 많은 소리, 아니 소음들이 주위를 채워 날이 바짝 서 있습니다.

쿠바에서는 삶이 어렵다 보니 ‘산테리아’라는 일종의 혼합종교주의에 심취한 이들이 늘어납니다. 가톨릭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쿠바 정부 당국과 서로 간의 이익이 맞아 특별히 수도 아바나 지역에서 성행하는 종교인데, 우리의 성인들을 신으로 추앙하곤 합니다.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추앙하는 우리네 성인이나 성모 마리아 축일에는 성당에 와서 미사에도 참례합니다. 우리 담을 맞대고 있는 이웃들도 다들 산테리아 신자들이라서 이들이 한밤중에 자기네 의식을 거행하면, 밤새도록 북이나 꽹과리 같은 것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살아있는 염소를 잡고 춤을 추고 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의식을 거행하는 날이 아니면,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고 새벽까지 음악을 듣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고요를 간절히 바랐는데, 독일에서 우리 연합회 총회를 마치고 귀국한 원장 신부님이 우리를 수도원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제가 고요를, 소리를 비워내는 것을 얼마나 바랐는지 깨닫게 됩니다.

 

고요한 쿠바 산호세 수도원 전경.


또 저희가 쿠바에 진출한지 14년이 지나가는 데 오랜 기다림 끝에 이제야 수도원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건물을 지을 여건이 되지 않아 스페인에서 조립식 건물이 들어올 예정인데, 성당 내부 장식은 쿠바식으로 할 예정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디를 가도 옛 스페인 방식대로 성당을 장식했는데, 그게 빈 곳 없이 성당을 꽉꽉 채우고 기둥마다 성인 상으로 치장해 놓아서 그런지 오히려 ‘눈과 마음을 너무 어지럽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하게 머무르면서 한 곳에 집중하고 싶은데 집중하지 못하는 저 자신의 나약함도 있지만, 전례 공간이 되는 성당 환경이 오히려 방해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온갖 성인 상이 오히려 산테리아가 좋아하는 요소가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무튼 저희 성당은 덜어내고 덜어내어 쿠바인들의 심성을 단순하고 소박하게 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오늘은 어떤 음악보다는, 반대로 전례가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덜어내고 비워내어 하나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침묵과 단순하고 소박한 공간의 모습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며칠 전에 아바나교구 보좌주교 서품식에 참여했는데, 저도 개인적으로 합창음악을 참 좋아하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마음도 참 많이 들지만, 가장 마음을 움직인 음악은 ‘살베 레지나’(Salve Regina)였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날그날 미사 전례 주제의 통일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터라 그리 선호하지는 않는데, 유럽과 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교회들에는 특별한 날 미사 끝에 성모 찬송을 부르는 전통이 있습니다.

주교 서품식이 있던 이날에도 마지막은 성모 찬송으로 미사를 마쳤습니다. 마침 묵주기도 성월의 첫날이기도 했고 또 잘 아는 ‘살베 레지나’라서 함께 따라 부르는데, 제 마음을 움직인 건 바로 오르간 반주였습니다. 온종일 열심히 성가대 합창 반주에, 화려한 곡들을 연주하던 연주자가 이 곡에서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페달로 ‘도’음 하나만을 길게 누를 뿐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장엄한 전례에 참례해서 전례음악의 향연에 푹 빠졌던지라, ‘이번에는 어떤 반주를 할까’, ‘네오 모달 반주로 예상치 못한 화음 전개를 보여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이런 반주는 엘마르 신부님 절친이기도 한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오르가니스트이자 그레고리오 성가의 대가이기도 한 80세가 넘으신 지 한참 되시는 라바누스 신부님 반주에서나 느낄 수 있던 것이었는데, 오랜만에 오로지 하나의 음만으로 주어지는 반주가 성모 찬송 노래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물론 오르간 연주자는 아직 한참 어렸고, 그레고리오 성가 반주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음을 덜어내고서 모든 음의 기초이자 주님(Dominus)을 상징하는 ‘도’(Do) 음 하나에 집중하게 한 이 반주가 모든 신자를 한목소리가 되게끔 하나의 노래로 초대한 감동은 참 오래갈 것 같습니다.

삶에서 전례에서 음악에서 이처럼 덜어내고 비워내다 보면 언젠가 하나의 소리 안에서 모두와 하나 되는 경험, 그리고 하느님과 내가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해 봅니다.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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