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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 하 (2020년 7월 19일, 가톨릭평화신문)

procurator 0 2,482 2020.07.29 09:41

공산당의 박해 끝에 월남… 왜관에 정착한 베네딕도회 수도자들

설정 100주년 맞는 원산대목구의 어제와 오늘 <하> 



2020.07.19 발행 [15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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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ㆍ25전쟁 중 원산 수복(10월 10일) 뒤 원산본당 출신의 최명화(베드로) 부제가 폐허가 된 수도원 성당에서 어린이들을 지휘하며 성가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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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1월 12일 분리된 함흥대목구의 주교좌본당으로 예정돼 있던 함흥성당(왼쪽)과 사제관 봉헌식에 신자들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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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간의 수난을 겪고 귀국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과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 수도승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원산대목구의 분리 


1940년 1월 12일. 비오 12세 교황은 원산대목구를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로 분리한다. 덕원자치수도원구는 함경남도 원산시와 안변ㆍ덕원ㆍ고원ㆍ문천군을 관할하는 독립 수도원구로 지정돼 원산ㆍ덕원ㆍ고원ㆍ고산 등 4개 본당을 운영하게 됐다. 또한, 함흥대목구는 수도원 구역을 제외한 함경남ㆍ북도 대부분을 관할하며, 회령ㆍ청진ㆍ함흥ㆍ영흥ㆍ북청ㆍ나남ㆍ흥남 등 7개 본당을 운영하게 됐다.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는 덕원자치수도원장 겸 함흥대목구장 서리로 임명됐다. 이로써 원산대목구는 사라지고, 분리된 덕원자치수도원구는 한국 교회의 첫 면속대수도원구로 출발했고, 함흥대목구는 독자적 한국인 교구 설정을 준비하게 됐다. 그러나 함경도 교회는 실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모든 본당 사목 책임자도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었고, 한국인 성직자가 본당 주임을 맡은 것도 1943년 이후였다. 

일제 강점하 교회의 수난


일제 강점 말기는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다. 일본과 독일은 동맹국이었지만 말뿐이었다. 일본 경찰은 모든 외국인을 간첩으로 의심했다. 전쟁 막바지엔 여행증 없이 원산으로 갈 수조차 없었다. 본당에 연금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매달 덕원수도원에서 열리던 사목회의도 중단됐고, 해마다 열리는 선교사들 피정만 겨우 허용됐다. 1942년 2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폐교되자 신학생들은 덕원신학교로 편입했지만, 결국은 덕원신학교도 일본군에 징발됐다. 
그런 상황에서 선교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1940년 분할 직후 11개 본당에 공소 89개소, 신자 1만 1064명, 성직자 35명(한국인 성직자 5명 포함), 수사 37명, 수녀 51명이던 것이 1944년 해방 직전이 되면 덕원자치수도원구가 4개 본당에 공소 35개소, 신자 5370명, 성직자 23명, 수도자 73명이 됐고, 함흥대목구도 9개 본당에 공소 31개소, 신자 5474명, 성직자 16명, 수도자 20명으로 기록돼 교세는 현상유지 수준이었다. 

해방 후 시작된 북한의 박해


하지만 일제 강점하 교회의 수난은 해방 이후 수난에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1945년 8월 21일, 소련군 진주에 계림 준본당으로 피했던 회령본당 주임 비트마로 파렌코프 신부가 성당이 불탔다는 소식에 회령으로 갔다가 이튿날 소련군에 피살됐다. 1946년 3월 5일 발효된 ‘북조선 토지 개혁령’으로 덕원수도원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건물과 대지를 제외한 435㏊의 토지를 몰수당하고 5㏊만 남았다. 이어 이듬해 단행된 북조선 화폐 개혁으로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부닥쳤다. 

북한 공산당의 체포와 투옥


1949년 5월 초까지는 형식적이나마 종교 자유가 보장됐다. 하지만 이에 앞서 1948년 말로 접어들며 박해 손길이 서서히 옥죄어왔다. 1948년 12월 1일 덕원수도원 경리 책임자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가 포도주를 불법으로 제조하고 탈세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1949년 4월 28일 덕원인쇄소 책임자 루드비히 피셔 수사가 ‘불온물 인쇄’ 혐의로 체포됐다. 이어 한 달 뒤인 그해 5월 9일 밤 공산당 정치보위부는 덕원수도원을 점령, 72세 고령에 와병 중이던 사우어 주교아빠스를 비롯해 루치오 로트(덕원수도원장) 신부, 아르눌프 슐라이허(덕원수도원 부원장) 신부, 루페르트 클링자이스(덕원신학교 철학 교수) 신부 등 4명을 체포 투옥했다. 이튿날인 5월 10일 밤 11시, 정치보위부원들은 또다시 수도원에 침입, 안셀름 로머(덕원신학교 교장) 신부 등 독일인 신부 8명과 수사 22명, 김치호ㆍ김종수ㆍ김이식ㆍ최병권 신부 등 4명의 한국인 신부를 체포했다. 이들 수도승과 한국인 사제들은 평양 인민교화소와 관문리 수용소, 옥사덕 수용소, 함흥 인민교화소 등에 수용됐다. 또한,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 등 총 99명을 수도원과 신학교에서 내쫓고 몰수했으며,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 원산수녀원도 5월 11일 폐쇄됐다. 


이 무렵 원산ㆍ고원ㆍ고원ㆍ고산ㆍ영흥ㆍ흥남ㆍ함흥본당에서도 신부와 수사들이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다. 6ㆍ25전쟁 발발 직전까지 교회를 돌본 이재철ㆍ김봉식ㆍ이춘근 신부 등도 전쟁 직전 체포돼 피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이로써 30년간 함경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는 완전히 폐쇄되고 만다.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에서 체포 투옥된 외국인 신부와 수사, 수녀 67명은 평양 인민교화소 등에 갇혔다가 옥사덕 강제수용소로 이송돼 4년간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 와중에 1950년 10월 ‘죽음의 행진’에 이어 중노동을 하며 수도자 중 25명이 희생됐고, 42명만이 생존, 1954년 1월 12일 독일로 송환했다. 이들 중 1949∼1952년 북한 공산 정권에 체포돼 순교했거나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는 성 베네딕도회 남녀 수도자들과 헌신자,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교구, 연길교구 소속 사제들 38위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라는 이름으로 시복이 추진돼 현재 교황청 시성성에서 심사 중이다. 

왜관수도원의 설립


월남한 베네딕도회원들을 중심으로 왜관수도원을 세웠다. 1952년 5월 덕원수도원 출신 티모테오 비테를리 신부가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뒤를 이어 덕원자치수도원구장 서리와 함흥교구장 서리에 임명됐고, 대구대목구장 최덕홍 주교의 제안으로 베네딕도회가 왜관에 정착, ‘왜관수도원 시대’를 열게 된다. 1954년 4월 9일에는 연길대목구장 서리도 비테를리 신부에게 위임됐고, 이때부터 비테를리 신부는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이어 1955년 수도원이 완공되면서 독일로 송환됐던 선교사들이 다시 한국에 들어왔고, 1964년 12월 대수도원으로 승격했다. 이어 1981년 이동호 아빠스가 덕원자치수도원구장 서리와 함흥교구장 서리를 25년간 맡았다. 이후 2005년부터 춘천교구장이 함흥교구장 서리로 겸직하게 됐다. 덕원자치수도원구장은 왜관수도원장이 그대로 유지해 이형우 아빠스에 이어 박현동 아빠스가 맡고 있고, 함흥교구장 서리는 장익 주교를 거쳐 현재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가 겸직하고 있다. 
이 같은 원산대목구 100년의 수난과 보람, 영광의 발자취는 이제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의 기도와 함께 새로운 100년의 복음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