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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 (19) 추억 함께 기념하게 해 주는 소리, 음악

procurator 0 1,844 02.13 15:17

시공간 뛰어 넘어 기억 속 그곳으로 우리를 데려가네


같은 시대 살아온 이들은 음악 공유
‘그 시절’ 음악 떠올리며 추억 잠겨보길
전례음악, ‘영원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


독일 유학 시절 친구들과 방문했던 일본 전통 마을의 옛 초가.


쿠바 친구들이 너무 겁을 주어서 괜히 걱정했나 봅니다. 자기네는 봄과 가을은 없고 1~2월에 반짝 시원해질 뿐 1년 내내 여름이라고 하던데, 한국 날짜로 추석이 지나니까 여기에서도 아침저녁 나절은 꽤 시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도 들립니다. 여기에도 귀뚜라미가 있는지, 아니면 비슷한 무언가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귀에는 가을밤을 알리는 귀뚜라미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 놀랐는데, 독일에서 살 땐 전혀 들을 수가 없는 소리였거든요.

몇 년 전, 제 아랫반이었던 친구들이 추석쯤 저를 만나러 한국에 놀러 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친구가 일본인이었던지라 왜관수도원에서 묵으면서 한국도 구경하고, 다음에는 일본인 친구 집에서 묵으면서 일본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일본 여정 중에 옛 초가집들로만 마을이 이뤄져 있는, 어떤 전통적인 동네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습니다. 이 동네를 방문한 손님이 우리밖에 없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 함께 여유 있게 마을을 산책하는데, 어두컴컴한 논밭에서 귀뚜라미가 막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한참 더웠는데도, 일본인 친구와 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 이제 가을이네” 하면서 가을 분위기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함께 따라온 독일과 폴란드 친구들은 갸우뚱해 하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하고 궁금해했습니다. 그제야 우리는 한국에서 들은 매미 소리, 일본에서 들은 귀뚜라미 소리를 독일에서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친구와 저는 두 계절을 알려주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라면서 딱히 설명하지 않았어도 그 소리가 주는 감정을 함께 공유했는데, 이 소리를 듣고 자라지 못한 친구들에게는 그저 소음 내지는 희한한 소리에 불과했던 겁니다.

어떤 추억이나 공통의 감성이라는 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함께 떠올리며 나누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이 경험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누었던 이야기 내용이나 눈에 담긴 어떤 장면 장면일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손으로 느끼는 촉감을 비롯해 어떤 맛이나 냄새, 소리로도 추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6개월간의 독일살이를 마치고 2년 만에 유학으로 다시 독일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맡은 냄새는 독일에서만 맡을 수 있던 가을 냄새였습니다. 할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은 다시는 맡아볼 수도 먹을 수도 없지만, 그 맛과 향은 아직도 금방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리.

어렸을 적 아침 일찍 매일미사에 나오시고 가는 귀 먹었어도 전례 때 열심히 큰 소리로 화답하던 할머님들의 특이한 톤이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어르신들이라고 해도 그런 톤으로 기도를 외우시는 분들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분들이 외우시던 기도를 들어보면 마치 천자문을 외우는 톤과 닮았습니다. 그게 또 신기한 게, 그냥 주욱 외워버리는 기도도 아니었고, 어떤 기도문을 가져다가 대입해도 비슷한 곡조로 가면서 마치 칸타타의 레치타티보와 같이 낭송이지만 동시에 음악도 되었는데, 속도도 말로 그냥 읽는 것보다는 느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노래로 천천히 부르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언어이자 음악이 되는 적당한 속도였습니다.
이 할머님들이 바쳤던 낭송 기도를 떠올려보니 지금도 할머니 옆에서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던 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시간을 성화시킨다는 시편기도에 곡조를 붙여 함께 낭송하는 건, 지금의 순간순간만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어 이스라엘 시편 저자의 추억을, 감정을 함께 공유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 전례음악은 크게 아나클레시스(anaclesis)와 독솔로지아(doxologia), 아남네시스(anamnesis)의 세 장르로 나뉘는데, 아나클레시스는 환호하고 대답하는 등 우리가 소리를 내어 하느님을 부르는 노래들입니다. 독솔로지아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찬송가로, 천사들의 찬송가(Hymnus Angelicus)라고도 하는 대영광송(Gloria), 세라핌의 찬송가(Hymnus Seraficus)라고도 하는 거룩하시도다(Sanctus), 암브로시오 찬송가(Hymnus Ambrosianus)라고도 하는 테 데움(Te Deum)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념을 의미하는 아남네시스에는 본기도와 같은 고유기도문들, 독서와 복음, 감사송 등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들이 노래로 바쳐질 경우 시편기도 같은 낭송하는 창법으로 노래하게 됩니다. ‘기념’이라는 것이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사건을 떠올리거나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편을 기도로 바칠 때처럼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원의 시간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고, 매번 달라지는 본문에 같은 낭송 방식을 적용해서 언제나 듣는 이들의 마음을 한 자리로 모으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는 소리는 이런 전례나 기도만은 아닙니다. 최근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던 이곳 성당 앞마당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 이후 거의 세 세대에 이르기까지 성당 앞 공터는 국유지가 되어 지난 몇 십 년간 관리를 안 한 탓에, 이곳 성당은 동네의 쓰레기장이 되었는데, 아무도 청소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제가 조금씩 조금씩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자기 집 말고는 관심이 없는 동네 사람들도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탓에, 조금 울적해져서 어느 날부터인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분 전환 삼아 90년대 가요를 듣기 시작했는데, 중고등학교 때엔 몇몇 친구들과 록 음악과 얼터너티브 음악에 빠져 있다가 나중에는 재즈만 들은 줄 알았더니, 아직도 거의 대부분의 가요를 따라 부를 정도로 외우고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들어보니 당시 가요에서 사용하던 여러 음악적인 방식이 꽤 신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당시 지금 제 나이대의 아버지가 “역시 조용필이 최고야” 하셨던 마음도 이해가 가고요. 그러면서 70년대 팝송도 들어보고, 다시 클래식 음악도 들어보고 있습니다.

이 노래들 모두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분들이 함께 흥얼거리고, 당시 추억에도 잠기게 해 주지 않나 합니다. 게다가 클래식은, 고등학교 때 음악 시험으로 클래식 음악 열댓 곡을 맞추는 게 있었는데, 첫 몇 부분만 듣고 맞추면 되는데도, 어머니 권유에 따라 아버지가 명동에 있던 음반 가게에 가서 해당하는 모든 음반을 사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이처럼 소리, 음악은 우리의 추억과 감정에 푹 젖게 도와줍니다. 이 가을, 좋아했던 음악들, 사연이 있는 음악들, 그리고 할머니의 기도 소리, 풀벌레 소리 모두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봅니다. 혹시나 집에 아이들이 있거들랑, 아이들과 함께 음악을 추억으로 나누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저는 일단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를 들어보렵니다.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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