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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신상원·김치호와 동료 순교자’ 38위 시복시성 위한 예비심사 법정 개정

procurator 0 1,289 02.13 15:29

근·현대 격변기에 믿음 지킨 신앙 선조 기억해야 

지난해 12월 28일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법정이 개정됨에 따라 한국교회 현대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행보가 빨라졌다.

이로써 한국전쟁 등 격변기에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잃은 근·현대 순교자들에 대한 활발한 조사 작업에도 관심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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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월 28일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 38위에 대한 예비심사 법정 개정식이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열렸다. 이로써 한국전쟁 등 역사 격변기에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잃은 근·현대 순교자에 대한 조사 작업이 활발해 질 것으로 보인다.
▧ 순교자 38위는 누구인가

이번에 시복시성을 위해 예비심사를 받은 대상자는 모두 38위로 성 베네딕도회 덕원자치수도원구와 함흥대목구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펼치다 1949~1952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순교한 이들이다.

이들은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를 비롯 성직수사 14명, 덕원·함흥교구 사제 4명, 평수사 13명, 수녀 3명, 평신도 1명으로 구성돼 있으며 연길교구 사제도 2명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25명은 독일의 7개 교구 출신 수도자들이다.

1952년 살아남은 덕원지역 수도자들은 남한 왜관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했고, 살아남은 독일인 수도자들 또한 1954년 고국으로 귀환하거나 왜관으로 돌아갔다.

▧ 어떻게 순교했나

부청원인 빌리브로드 드리버 신부는 시복시성 예비심사 청원서에서 “순교자들은 깊은 신심을 지니고 그리스도께 충실함으로써 이미 오래 전부터 순교할 준비가 돼 있었다”며 “순교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살해당한 이유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신앙 그리고 가톨릭교회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순교자 38위는 평양 인민교화소, 옥사덕수용소, 만포 관문리수용소, 함흥 감옥, 원산 인민교화소, 순안 인민교화소, 평양 감옥 등 북한지역에서 순교했으며 몇몇 생존자와 순교자는 증언록과 편지 등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대치하는 공산주의 이념은 이들에게 혹독한 박해와 비인간적 처우를 자행했는데 17명은 평양 인민교화소나 다른 곳에서 총살 등으로 살해됐으며, 2명은 비인간적 처우와 부족한 의료행위로 목숨을 잃었다. 13명은 옥사덕수용소에서 영양실조, 과로, 배고픔, 추위, 육체적 쇠약 등으로 순교했으며 4명은 옥사덕에서 만포수용소로 죽음의 행진을 하던 중 목숨을 잃었다.

또 연길교구 사제인 한윤승 신부는 해주시 인민재판소에서 15년 형을 언도받은 후 살해됐거나 인근 바닷가 모래톱에 생매장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같은 교구 사제 신윤철 신부 또한 강제연행 돼 어디론가 끌려가 살해됐다고 전해진다.

■ 순교자 신상원·김치호의 삶과 행적

이번 시복시성 법정 예비심사대에 오른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김치호 베네딕도와 동료 순교자들’은 어떻게 믿음을 증거 했을까. 38위 순교자 가운데 덕원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대목구장 신상원와 덕원수도원 최초의 한국인 성직수사 김치호, 그들의 고귀한 신앙 흔적을 추적한다.

▲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 아빠스

덕원자치수도원구장 겸 함흥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1877년 독일 헤센에서 태어나 1898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수련기를 시작했다. 한국이름은 신상원.

당시 노르베르트 베버 총 아빠스는 뮈텔 주교에게 서울에 선교 베네딕도 회원들을 파견하기로 약속했다.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된 그는 1909년 한국으로 파견됐고,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설립됨에 따라 그곳에서 원장을 역임한다.

1913년 아빠스로 축성된 보니파시오는 1920년 포교성성이 서울 베네딕도 회원들에게 원산대목구를 위탁함에 따라 원산대목구장으로 임명됐으며 다음해 주교로 서품됐다.

그는 선교직무를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선교지역과 떨어져 있던 서울 수도원을 원산 근교의 덕원으로 옮겼다. 이후 약 20년 동안 그의 관할구역에는 24개 본당이 설립됐고 대부분 본당에 정부가 인가한 보통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적인 선교 사도직과 수도생활은 공산당의 집권과 동시에 중단돼야만 했다. 1949년 5월 9일과 10일 사이 정치보위부원들이 수도원에 난입해 장상과 독일인, 한국인 사제들을 체포한 것이다. 이들은 원산교도소에 수용됐다가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됐으며, 재판을 통해 ‘반공산당을 위한 사보타주’라는 죄목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당시 심한 천식을 앓고 있었는데 독방에 감금돼 약 6개월 동안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루치우스 로트 원장신부는 감옥에서 몰래 보낸 편지를 통해 1950년 10월 15일 내려진 선고의 이유와 당시의 상황을 적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소위 ‘나쁜 사상’ 때문이었다. ‘나쁜 사상’이란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대치되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감방을 한 번 둘러보기만 해도, 좁고 더러운 구덩이 같은데 한구석에는 변기가 있어 온통 악취를 풍겨대고 있음을 알 것이다. 아무런 난방장치도 없었기 때문에 주교 아빠스님은 그냥 추위를 견딜 수밖에 없었다. 다른 죄수들보다 적은 쌀로 버텨야 했다. 그는 3일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1950년 2월 7일 아침 6시 평화로이 숨을 거두고 영원히 잠들었다”고 기록했다.

▲ 김치호(베네딕도, 金致鎬) 신부

덕원수도원 최초의 한국인 성직수사인 김치호 베네딕도 신부는 1914년 3월 31일 서울대목구의 유명한 교우촌인 갈곡리(현 경기도 파주시 법원면 갈곡리)에서 태어났다.

12살의 나이로 서울 백동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입회한 그는 1942년 5월 1일 덕원수도원 성당에서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 아빠스의 주례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다음해 6월 덕원본당 보좌로 부임해 청년사목을 담당했던 그는 1945년 덕원본당 주임으로 임명됐으나 폐병을 심하게 앓아 사목활동에 지장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사제로서의 꿈은 공산당이 집권하며 산산이 부서졌다. 1949년 5월 11일, 덕원수도원에 있던 독일인 수도자들과 한국인 신부들이 체포돼 평양 인민교화소로 압송된 것이다.

경도범 엘리지오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김치호 신부는 여러 명이 함께 수감된 습기 찬 좁은 감방(8㎡ 면적에 18명이 함께 수감)에서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했다고 전해진다.

1950년 10월 5일, 북한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후퇴할 때 그는 폐병으로 각혈이 심한 상태였는데 각목으로 구타를 당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오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