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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철의 역사품은 국보] 80년만에 돌아온 `겸재 화첩`은 왜 국보가 못 되나

procurator 0 127 02.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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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필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54.5×33.0㎝)'. 왜관수도원 소장. 나무가 우거진 선명한 녹색 산 속에서 붉은 색 사찰들이 대비를 이뤄 신선한 감각을 드러낸다.

성 베네딕도회는 "기도하고 일하라"는 정신에 따라 육체노동을 통해 수행하는 로마카톨릭 소속의 수도회다. 베네딕도 수도회의 여러 수도원 중 한 곳인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회는 1909년 우리나라에 사제를 파견해 서울 백동(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했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인 백동수도원이다. 수도회는 한국의 언어, 문화, 예술에도 관심을 가져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수도회는 교구가 함경도, 북간도로 넓혀지면서 1927년 함경도 원산 덕원으로 이사간다. 서울 백동수도원 자리에는 대신학교(가톨릭대학), 혜화동성당, 동성학교가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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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수도회는 그러나 해방후 공산군에 의해 강제 폐쇄됐고 수도사들은 독일 본국으로 추방되거나 강제노역 중 순교했다. 일부 생존자들이 북한을 탈출해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낙동강 옆의 칠곡군 왜관에 터전을 잡고 정착했다. 세월이 흘러 1970년대 오틸리엔 수도회의 한국 소장품 중 뜻밖의 유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1973년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는 독일 쾰른대(미술사학과)에서 유학 중이었다.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대학도서관을 뒤지던 그는 오틸리엔 수도회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대수도원장이 쓴 <금강산에서>(1927년 발간)를 펼쳐보고 무척 놀랐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이 있었다. 1925년 6월 2일부터 12일까지 베버의 금강산 여행담과 함께 겸재의 그림 3점이 삽화로 실렸던 것이다. 유 교수는 오틸리엔 수도원에 그림의 소장여부를 묻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런 그림은 한 점도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듬해 사실을 확인하고자 독일 남부 알프스산맥 기슭의 암머 호수가에 위치한 수도원을 직접 방문했다. 수도원 내 민속관에는 한국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유 교수는 진열장 틈새에서 드디어 여행기 속의 겸재 그림을 찾아낸다. 겸재 그림은 몇 장이 아니라 화첩이었다. 유 교수는 수도원 허락을 얻어 진열장에서 화첩을 꺼내 자세히 살폈다. 화첩은 비단에 그린 총 21점의 그림으로 구성돼 있다. 유 교수는 "둘레가 벌집처럼 좀먹어 이미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손상됐다"면서도 "의외로 많은 편수에 만족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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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서울 혜화동에 설립된 백동수도원. 왼쪽은 혜화문 성 안쪽이고 오른쪽이 백동수도원 본관이다. 백동수도원 자리에는 현재 가톨릭대학교가 들어섰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발간 <성 베네딕도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소장 서울사진> 中.

귀국 후인 1976년 연구 결과물을 <미술자료> 제19호와 <공간> 제115호를 통해 공개해 새로운 겸재 화첩의 존재를 국내에 알렸다. 이 일을 계기로 뒤늦게 화첩의 중요성을 인식한 수도원측이 화첩을 금고 속에 넣어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게 된다. 1990년대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수행하던 한 한국인 사제가 겸재 화첩을 주목했다. 왜관수도원의 선지훈 신부였다. 그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6년간 오틸리엔 수도원에 머물며 독일 뮌헨대에서 교회사를 공부했다. 수도원에서 화첩을 접한 선 신부는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가야할 문화재라고 생각하고 수도원측에 반환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인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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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필 '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28.8×23.3㎝)'. 왜관수도원 소장. 태조 이성계가 성장기를 보낸 함흥 본궁에 있었던 소나무를 그린 그림이다. 소나무를 강조하기 위한 대담한 구도와 소나무의 표현력이 돋보인다.

그러던 사이 한국 책가도(冊架圖)를 평생 연구한 미국 덴버미술관 케이 E. 블랙 연구원의 '상트 오틸리엔 소장 정선의 진경산수화' 논문이 1999~2000년 겨울호 <오리엔탈 아트>에 실리면서 화첩은 이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미국 뉴욕의 세계적 경매회사 크리스티가 접근했고 경매가로 50억원이 제시되기도 했다. 선 신부는 동문수학한 예레미야스 슈뢰더 신부가 대수도원장에 임명되자 본격적으로 반환을 요청했다. 보존 환경의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고 또한 오틸리엔 수도원의 한국 진출 100주년도 앞둔 시점이기도 했다. 선 신부의 끈질긴 설득은 오틸리엔 수도원의 결단을 이끌어냈고 결국 화첩은 2005년 10월, 왜관수도원에 영구 대여하는 형식으로 한국으로 귀환했다. 화첩에는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화첩>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화첩은 1925년 한국에서 입수됐다. 오틸리엔 수도회의 베버 대수도원장은 선교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우리나라에 왔다. 베버 대수도원장은 1909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견했던 인물이다. 그는 1911년 2월 처음으로 방한해 같은 해 6월까지 체류했다. 이어, 1924년 말 다시 동아시아에 와서 다음해 말까지 한국에 머물렀다. 베버 대수도원장은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와 풍습에 매료돼 전국을 두루 여행했으며 한국에서의 경험을 상세한 기록과 영상, 사진으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수많은 문화재도 모아 독일로 가져갔다.



기록을 종합하면, 화첩은 베버가 1925년 금강산을 여행할때 인천에서 은행업을 했던 독일인 등 지인들이 구입해 선물로 줬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명동성당 주변에 골동품상이 많았던 만큼 이곳에서 샀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적으로 숱한 명화들이 화마에 자취를 감췄다. 겸재 화첩도 두번 씩이나 불에 탈 뻔했다. 1980년대 초 뮌헨의 바바리아 주립 고문서연구소에 근무하던 베네딕도회 수녀가 화첩의 보존처리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얼마 뒤 수녀의 아파트에 불이나 그녀가 사망하고 화첩의 행방도 묘연해져 소실된 것으로 여겨졌다. 후일 화첩은 고문서연구소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고 보존처리가 완료돼 지금의 남색 비단으로 표구됐다.

한국으로 반환된 지 2년여 뒤인 2007년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4월 6일 새벽 왜관수도원 본관 건물에 전기누전으로 추정되는 대형화재가 난 것이다. 화재로 수도원의 수많은 유물과 유품이 사라졌다. 문서고에 보관 중이던 화첩은 다행히 신부들이 제일 먼저 대피시켜 무사했다. 화첩은 안전을 위해 2010년 10월 이후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 보관하고 있다.



겸재 화첩은 진경산수화 5점, 산수인물화 3점, 고사인물화 12점, 동물화 1점이다. 정적이고 절제된 양식, 정반대로 회화적 감각이 강조된 추상적 기법 등 다양한 화풍이 구사돼 정선의 폭넓은 예술세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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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필 '고산방학(孤山放鶴· 29.2×23.5㎝)'. 왜관수도원 소장. 북송대 은일시인 임포가 동자와 더불어 매화나무에 기대어 학의 비상을 한가롭게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했다.

금강산의 전체 경관을 담은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 54.5×33.0㎝)'와 내금강의 명소인 '만폭동', 외금강의 '구룡폭' 등 금강산 그림 3폭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화첩 맨 앞에 '금강내산전도' 양면에 걸쳐 그려져 있는 금강내산전도는 오른쪽 하단의 장안사부터 삼불암, 만폭동, 보덕굴, 정양사 등 금강산의 주요 건축물과 경승지를 상세하게 담아냈다. 나무가 우거진 선명한 녹색 산 속에서 붉은 색 사찰들이 대비를 이뤄 신선한 감각을 드러낸다. 그림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1747년 작품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의 '금강내산도'와 흡사해 정선의 말년 작품으로 짐작한다. 태조 이성계가 성장기를 보낸 함흥의 고향집에 손수 심었다고 전하는 소나무를 그린 '함흥본궁송'과 대동강변의 연광정을 중심으로 평양성을 묘사한 '연광정'은 겸재가 직접 가지 않고서도 실감나게 그린 것이다. '함흥본궁송도'와 관련해 1756년 함흥에 다녀온 조선후기 문신인 박사해(1711∼1778)는 자신의 문집 '창암집'에서 "본궁을 방문한 적이 없는 정선에게 본궁송을 그려달라고 청했더니 설명만 듣고도 실제로 본 듯이 묘사해 냈다"고 적었다.

'압구정'은 숙련된 필법과 농담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정선의 뛰어난 공간 묘사력을 보여준다. 압구정 주변의 전경을 보여주는 간송미술관 소장 '압구정'과는 달리 정자의 웅장한 규모가 부각돼 있어 흥미롭다.

고사인물화 중에는 북송대의 시인 임포(967∼1028), 장재(1027∼1077), 사마광(1019∼1086)의 한가로운 은일의 즐거움을 다룬 '고산방학(孤山放鶴)', '횡거관초(橫渠觀蕉)', '노재상한취(老宰相閑趣)' 등이 돋보인다.

<왜관수도원 소장 겸재 화첩>은 우리나라에 있기는 하지만 엄밀히는 한국 문화재가 아니다. 들여올 때 임대형식을 취해 여전히 독일 수도원의 소유다. 따라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없는 것이다. 2011년 프랑스에서 되돌려 받은 외규장각(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 의궤 역시 그런 경우다. 80년만에 귀환한 화첩은 9월 25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전에서 볼 수 있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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