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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영남 천주교의 요람 칠곡 (2020년 4월 13일,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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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②영남 천주교의 요람 칠곡

 

매일신문 배포 2020-04-13 11:39:08 | 수정 2020-04-24 08:22:40 |

 

천주교 박해 견디며 신앙 나누고 전파…가톨릭 선교 교두보
영남 천주교 터전 '신나무골'…천주교 일찍 받아들인 경북 칠곡
백리산길 오가며 신부들 신앙 전파…성당·수도원 사적도 곳곳에 위치
대구교구 2호 성당 '가실성당'…낙동강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
6·25 전쟁 땐 야전병원으로도 활용…붉게 쌓인 벽돌 자연과의 조화 일품
소통하며 걷는 '한티 가는 길'…이름도 없이 묻힌 남녀노소 순교자
묘역 앞에 세워진 대형 십자가 숭고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가실성당. 우리나라 11번째 성당이자, 계산성당에 이은 대구교구 두 번째 성당이다. 6·25 전쟁 중에도 야전병원으로 쓴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추기경의 아버지가 큰 딸의 세례를 받게 한 곳도 여기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가실성당. 우리나라 11번째 성당이자, 계산성당에 이은 대구교구 두 번째 성당이다. 6·25 전쟁 중에도 야전병원으로 쓴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추기경의 아버지가 큰 딸의 세례를 받게 한 곳도 여기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고난의 시절

소년시절 홀로 남은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김영석 요셉)에게 김보록 신부는 울타리였다. 서양 신부들은 순교자의 아들을 기꺼이 거두었다. 옹기와 숯을 굽고 파는 일도 익히게 했다. 지금은 골프장으로 변했지만 칠곡 장자동은 당시 옹기 굽는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이었다. 클럽하우스 옆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추기경 아버지가 이곳에서 도공으로 일했다는 구전이 새겨져 있다. 신나무골에 사제관을 연 김보록 신부가 그를 장자골로 불렀을 터다.

추기경 아버지와 어머니(서중화 마르티나)는 믿음 하나로 부부가 됐다. 가진 것 없는 그들에게 옹기 굴만한 보금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한 곳에 머물 수는 없었다. 옹기 구울 흙을 찾아 신나무골과 장자골에서 왜관, 김천 지대골로 떠돌았다. 추기경은 생전 '우리 팔남매는 태어난 곳이 저마다 달랐다'고 가난한 시절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추기경이 겨우 보통(초등)학교 1학년 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그저 '마음씨 착한 충청도 양반'이라는 정도였다. 서울 동성학교에 다니던 시절 친척 고모가 "꼭 네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아버지 생각이 날 때면 거울을 들여다봤다.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칠곡 장자골. 현재 세븐벨리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골프장 조성 당시 마을 돌담과 옹기터, 청동 십자가 등이 발견돼 클럽하우스 앞에 신자촌 표지석을 세웠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았던 칠곡 장자골. 현재 세븐벨리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골프장 조성 당시 마을 돌담과 옹기터, 청동 십자가 등이 발견돼 클럽하우스 앞에 신자촌 표지석을 세웠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어머니는 꿈에도 잊을 수 없었다. '어머니 내 어머니'라는 추기경의 글에는 기르고 가르쳐 성직의 길로 이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절절이 넘친다. 어머니는 세 살 터울의 형(김동한 신부)을 빼면 위로 누나와 형들은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떠돌이 행상의 고단한 일상에도 어머니의 믿음과 소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늦게 본 두 아들은 가르치고 싶었다. 꼭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하고 싶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며 뿌리 없는 꽃이 어디 있으랴. 추기경이 지녔던 믿음의 뿌리는 순교자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피눈물과 땀으로 자라났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한국전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이북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 수도자들에 의해 1952년에 설립됐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한국전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 이북 덕원 수도원과 만주 연길 수도원 수도자들에 의해 1952년에 설립됐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영남 천주교의 터전 칠곡

박해 시절 천주학은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모르는' 서양 오랑캐의 사악하고 해괴한 짓거리였다. 그러나 죽어나가는 교인이 수천수만으로 쏟아질수록 사람들의 눈과 귀는 달라졌다. 처형장에 끌려온 '천주쟁이'의 마지막 모습은 희한했다. 벌벌 떨기는커녕 되레 태연한 사람들이 적잖았다. 목이 잘려 나갈 판국에 '천당 가서 만나자'며 미소 짓는 얼굴에서는 두려움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천주교가 무엇이기에….' 발 없는 소문과 호기심은 금방 천리를 갔다.

김보록 신부에게 칠곡 신나무골은 영남 전교의 교두보로서 안성맞춤이었다. 대구까지는 하루 길이었다. 낙동강 물길도 고마운 존재였다. 기존의 신자촌 말고도 칠곡 여기저기서 신자들이 늘어갔다. 한티 사람들과 서양 신부는 백리 산길을 오가며 신앙을 나누었다. 김천, 상주, 문경에서도 신자들이 찾아왔다. 전교는 대구로 이어져 다시 밀양, 울산으로 뻗어갔다.

천주교를 일찍 받아들인 까닭일까, 칠곡은 상대적으로 천주교 신자 수가 많다. 고찰과 석탑, 마애불도 있고 유교 강학소와 선비들의 고택도 즐비하지만 어느 고장보다 천주교 사적이 쉽게 마주친다. 순교 마을은 물론이고 성당과 수도원은 고스란히 역사의 현장이 됐다.

칠곡 가실성당 성모당에서 바라본 가실성당. 우리나라 11번째 성당이자, 계산성당에 이은 대구교구 두 번째 성당이다. 6·25 전쟁 중에도 야전병원으로 쓴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추기경의 아버지가 큰 딸의 세례를 받게 한 곳도 여기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칠곡 가실성당 성모당에서 바라본 가실성당. 우리나라 11번째 성당이자, 계산성당에 이은 대구교구 두 번째 성당이다. 6·25 전쟁 중에도 야전병원으로 쓴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추기경의 아버지가 큰 딸의 세례를 받게 한 곳도 여기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 가실성당과 한티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자리한 가실성당은 우리나라 11번째 성당이다. 미끄럼틀이 아담하게 꾸며진 성당 초입의 작은 풀밭에는 철없는 아이들이 뛰놀고 백년을 이어 온 종소리는 방문객을 편안하게 맞이한다. 6·25 전쟁의 격전지였지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야전병원으로 쓴 덕분이다.

김보록 신부는 처음 초가집 성당을 열었다. 경상도 북부지역 전교를 맡은 파이야스(하경조) 신부가 오늘의 모습으로 세웠다. 계산성당 다음의 대구교구 2번째 성당이다. 설계는 계산성당을 지은 신부가 맡았다. 가실성당의 주보성인은 예수의 외할머니 안나다. 성당 안 제대 오른편의 안나상은 신축 당시 프랑스에서 가져왔다. 추기경의 아버지도 가실성당을 다녔던 모양이다. 큰 딸의 세례를 여기서 받게 했다.

누군가 가실성당은 눈 내리는 겨울이 좋다고 했다. 붉은 벽돌과 흰 눈의 조화가 일품이라고 평했다. 굳이 겨울이 아니라도 가실성당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영화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고즈넉한 천년 고찰의 첫 인상과 다르지 않다.

추기경의 토함산 석굴암에 대한 회상이다. '석굴암을 봤을 때 무엇인지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로마 바티칸의 세계적인 미술품 성상들을 볼 때도 한 작품을 5분 이상 본 적이 없었다. 내 안에 불교적인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종교와 대화를 나누고, 고유하고 불멸하는 가치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추기경은 유학자 심산 김창숙의 묘소도 참배했다. 유교식 예법대로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우리 역사 속 천주교와 유교의 해묵은 질곡을 벗어버린, 아름다운 만남이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마뜩찮다는 시선도 있었다. 이에 대한 추기경의 대답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꼿꼿한 선비로 살아온 분에게 존경의 예를 표함은 당연하다. 그분의 종교가 무엇이든, 참배를 유교식이나 불교식으로 하건 그건 문제가 아니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하다"는 것이었다. 가실성당은 그 자체가 소중한 우리의 역사다.

한티성지 내 순교자 묘역 앞에 세워진 대형 십자가와 입석. 크고 작은 입석은 한티마을의 남녀노소 순교자를 뜻한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한티성지 내 순교자 묘역 앞에 세워진 대형 십자가와 입석. 크고 작은 입석은 한티마을의 남녀노소 순교자를 뜻한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한티성지는 천주교 신자들이 난리를 피해 숨어 살던 곳이자 목숨을 잃은 곳이다. 유해도 묻혀 있다. 그래서 신자들은 완벽한 성지라고 한다. 확인된 순교자의 묘 37기 중 이름을 남긴 이는 서넛뿐이다. 한티 순교자들에게는 전시 군율인 선참후계가 적용됐다. 심문도 없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목이 잘렸고 집은 불태워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흩어진 시신을 묻으며 다짐했다. 거룩한 땅을 자자손손 보존하겠노라고.

순교자 묘역 대형 십자가 오른 편의 크고 작은 돌은 한티마을 사람들을 상징한다. 말없이 서있는 돌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한티 가는 길

길은 사람과 함께 했다. 사람이 다니면 공간으로서의 길이 됐고 삶의 과정, 시간도 길이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에 따라 오만가지 길 이름이 생겨났다. 꽃가마 타고 가는 비단길만 길이 아니었다. 꼬부랑길에 오르막길이 더 많았다. 인생을 길로 비유한 동서고금의 선인들은 길 위에서 참고 견디는 즐거움을 배우라고 충고했다.

'한티 가는 길'의 제3 구간인 '뉘우치는 길' 구간. 조용한 산 중턱으로 길이 이어져 힐링에 안성맞춤이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가실성당에서 신나무골을 거쳐 한티까지의 45.6km는 '한티 가는 길'로 불린다. 산티아고 순례 길을 본 따 '한티아고'라고도 한다. 걷기열풍이 불며 온갖 이름의 순례 길, 힐링의 길이 사람들을 부른다. 한티 가는 길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 대신 고난을 참고 견디며 희망을 찾아간 옛 사람들의 마음을 전해준다.

지난해 7월 13일 매일신문 주최로 열린

지난해 7월 13일 매일신문 주최로 열린 '한티가는길 달빛잔치'에 참가한 순례객들이 한티성지로 가는 숲 체험 산책길에서 소원지를 묶고 있다. 매일신문 DB

한티 가는 길 다섯 구간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이어진다. '돌아보는 길' '비우는 길' '뉘우치는 길' '용서의 길' '사랑의 길'이다. 절박했던 옛 사람들의 고난의 길을 오늘 사람들은 나누고 함께하는 소통의 길로 걷는다.

추기경은 대구서 태어났다. 서너 살 쯤에는 선산, 한두 해 뒤에는 군위에서 자랐다. 추기경의 기억에서 길은 단골이었다. 선산에서 군위로 큰 고개를 넘어 간 어린 시절의 기억은 만년까지 선명했다. 해 지는 저녁 고갯마루를 바라보며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모습도 생생하게 남았다. 추기경은 참고 기다리는 행복을 길에서 배웠을까.

〈서영관 스토리텔러〉